-제2회 부산국제 차.공예 박람회를 다녀와서 - 2편에서 이어집니다.

1,2 편을 쓰고 며칠이 지난 오늘에야 3편을 잊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상세하게 둘러보지 못했지만 좋은 추억과 경험으로 남을듯 합니다.

열린 공간이라서 여기저기 전시관을 관람하는 동안 한쪽에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빈자리가 많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가 편안했습니다. 바하 미뉴엣 3 번...파헬벨 캐논변주곡, 베토벤 론도 에스프레쉬브 알듯 모를듯 했지만 듣기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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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게 본 작은 전시회중 하나는 소담재 허경혜님의 흙사람전이었습니다.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두드리고 붙여 만든 생활자기와 흙사람을 만들어 투박한 질감을 느낄 수 있으며 흙사람은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느껴보는 작품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소담재(小潭齋)는 허경혜님이 운영하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4848-16,옛 김해평야의 낙동강 기슭 한 언저리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을 겸한 찻집이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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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혜님의 작품에 대해 잘 이해하게 해주는 관련 기사 한토막을 스크랩했습니다.

흙사람이 보낸 편지

●‘소담재’에서 만난 ‘역사’

배고픔만이 아니다.여자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차별받고 부대끼면서도 죽는날까지 참아야만 했던 한국의 어머니들이 모두 모여 서 계신다.모두가 일하는 모습이다.흔히 노동이라고 표현하는,육체를 수고롭게 움직여 식구들과 이웃의 삶을 보살피고 있는 동작은,멈춘 상태로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긴장감이 짙게 느껴진다.얼핏 1900년 무렵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외세와의 갈등과 시련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한국인들의 생활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한국인을 인간의 길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껴안고,업고,다독여 오늘까지 데려오신 어머니 모습이다.

이같은 어머니 모습을 빚고 있는 허경혜씨도 여성이다.우연한 기회에 그의 작품전을 알리는 작은 신문기사를 읽고나서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그런지 몇 해를 지나서 또 우연히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퍽 인상적이었다.그는 그의 작품을 토우(土偶)라 불렀는데,나는 토우라는 이름보다 ‘흙사람’이라는 말이 더 좋겠다고 했다.토우와 흙사람은 좀 다른 세계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허경혜씨의 ‘흙사람’은 한국인의 역사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한 미술양식이다.따라서 토우,토용(土俑),명기(名器)라고도 부르는 것들과 다르게 보아야 할 것 같다.중국,한국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되어온 토우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세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또한 희랍 로마에서 발달한 테라코타(Terra-cotta)나 일본 문화인 하니와(埴輪)와도 다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토우’와는 다른 ‘흙사람’의 세계

이른바 토우는 사람 모습을 갖춘 것과 여러 가지 동물,생활용구 등 모든 표상물들로서 주술적인 우상,무덤에 껴묻기 위한 부장용(副葬用)으로 만든 것들이다.특히 한국과 중국 고대 사회에서의 토우는 인간이 죽은 뒤의 세계와 영혼의 미래를 상징하는 신앙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주종관계를 전제로 하여 지배자의 시체와 함께 노비나 하인을 산 채로 파묻던 고대 국가의 습속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이 때 토우에 나타난 인물상들은 여성의 성적 특징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다산신앙과 풍요를 나타내거나 공예적으로 두드러진 기법을 이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우주관이나 사생관(死生觀)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그런 연유로 토우의 외형이 당시의 생활상·사회상을 짐작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하지만 이 토우가 주술적 우상성과 주종관계를 위한 제물로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몰인간성 이념을 유지한 채 현대사회의 한 미술형식으로 재현,혹은 답습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무의미한 낭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허경혜씨의 ‘흙사람’은 이런 전통사회에서 있어 온 토우들과는 선명하게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흙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움인데 그런 점에서 전통시대의 나한신앙(羅漢信仰)이 지닌 특징들과 일정한 소통관계를 지니고 있다.한국인들이 꿈꾼 자유로움이 나한신앙에 잘 나타나 있는데,이들 나한상은 다른 불상과 달리 엄격한 도상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바위 위에 앉거나 팔을 괴고 쉬는 자세,기분 좋게 서있는 자세 등으로 표현되는데 표정도 가지각색이다.눈을 내리뜨고 참선하는 얼굴,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거나 빙긋이 미소짓는 모습,찡그린 얼굴 등 다양한 인간의 표정을 보여준다.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성격과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적절하게 융화시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그렇게 볼 때 흙사람은 유장한 한국인의 전통신앙체계를 근간으로 삼되 종교적으로 의존하거나 이미지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전통의 힘과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사랑과 믿음,갈등과 불안을 담백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는 점은 흙사람의 장점이자 미덕이다.

소백산맥 이남의 흙 중에서 산화철 성분이 적고 흙 알갱이가 굵으면서 내화도가 높은 흙을 이용하여 인간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점도 좋아보인다.

●노예노동보다 고통스러웠던 보릿고개

그가 집중하고 있는 20세기 초 중반 무렵의 한국 농촌의 여성상은 수많은 회화와 조각들로 표현되어온 기존의 미술적 혹은 역사적 평가와도 조금은 궤적을 달리해야 할 것 같은 문화다.가난과 질곡으로 압축되는 20세기 초중엽 농촌 사회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무거운 노동과 정신적 중압감을 받으며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과 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도맡아해 낸 것은 어머니였다.양반 사대부 가정과 달리 민중의 삶은 여성들의 희생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였다.의료시설과 의약품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여러 명의 자식을 생기는 대로 낳아 기르는 일은 죽음에 가까운 위험하고도 무모한 생존 그 자체였다.

식량부족은 곧 산모와 여성들에게 영양결핍을 고질적인 일상으로 만들었고 대가족의 빨래와 식단차리기 등은 견디기 힘든 노예노동에 견줄 만했다.그 어떤 어려움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보릿고개로 불려온,긴 긴 봄날의 굶주림이었다.토지 부족과 식량 부족이 일상화된 가운데서 해마다 반복되는 보릿고개는 특히 젖먹이를 키우거나 임신중인 어머니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천형과도 같았다.

그런 질곡의 세월은 적어도 보리농사가 시작된 18세기 무렵 이후부터 더욱 극심해진 한국 농촌의 비극이었다.한국 농민들이 하루 세 끼니의 식사를 하게 된 것이 1960년대 이후부터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보릿고개 시절에는 하루 한 끼니조차도 제대로 거치기가 쉽지 않았었다.굶주림과 고난중에도 어머니는 임신을 해야 하고 자식을 낳고 길러야만 집안과 사회가 이루어진다.

똑같이 굶으면서도 임신하고,젖 먹이고,어린 자식 품어 키워내야 하는 역할은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다.따라서 한국 어머니는 한국 역사의 절반이 아닌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온 몸으로 도맡아왔다.그런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역사 바깥이나 다름없는 홀대와 차별의 불길 속에 서서 살아왔다.그러다가 현대사회라는 이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까지 와버렸다.전통적 가치와의 충돌로 생기는 늙으신 농촌 어머니의 고독,깊은 상실감,소외와 박탈감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고백록을 쓰듯이 어머니의 수난사를 흙으로 표현하게 된 것 같다.

●‘강철문명’과 맞서는 흙의 힘

콘크리트와 강철 등 인공적 조형과 냉혈한 금속성,생명의 단절과 괴리를 멈추지 못하는 도시문명 속에서 허경혜씨가 들고나온 것은 흙이다.흙의 부드러움과 온유함,자연성과 생명성을 상징하는 흙 한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한국여성사의 한 단면을 조형해내는 그의 작업은 분명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어머니 마음으로 읽혀진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임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흙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잠시 우리가 걸어왔고 지향하고 있는 목표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좋겠다.

쇼나조각전시관

쇼나(SHONA)는 아프리카 짐바브웨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부족 이름으로 조각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짐 바브웨란 토착어로 [돌의 집] 또는 [성스러운 집]이란 뜻으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거석(巨石)문화 유적을 지닌 나라라고 합니다.  그들은 스케치를 하거나 밑그림을 그리지않고 순수하게 돌과 자연에 깃들여 있는 형태를 자연스럽게 끌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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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몇장 남기지 못했지만 매력적인 쇼나조각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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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작품에 푹 빠질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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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나조각은 1969년 현대미술의 성전이라 불리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영국의 선데이 텔리그라프지가 "세계를 이끄는 10명의 조각가를 꼽는다면 최소한 5명은 쇼나조각가일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또한 쇼나조각은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 마티스 등과 같은 대가들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 유럽 등지에 "쇼나조각파"라는 조각가군을 형성할 만큼 그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록펠러재단, 영국의 브리티쉬 로열패밀리, 프랑스의 현대미술과, 로뎅박물관 등 세계적인 수집단체들이 쇼나조각의 주요 컬렉터들 입니다.

쇼나조각가들은 주변의 친숙한 대상을 소재로 오로지 정과 망치, 샌드페이퍼만으로 돌을 쪼아내고 연마하여 자신들의 영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대서 세계는 그들의 조각을 "혼의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Saba Carpet 전시 판매도 있었습니다.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지만 분명 엄청나게 비쌀듯 보입니다.
카페트 판매점이 뭐 대단해 할지도 모르지만 페르시아 수직 카페트는 물건이 아니라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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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이고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라 한산해 보입니다. 인상좋은 아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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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페르시아 카페트에 대해 알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부드러운 감촉·우아한 디자인 … 예술의 경지 
 
유목민 주거생활 필수품 전통 문양 … 부·권위 상징 정교한 품질 세계 최상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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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펫은 양모와 견사, 무명 등을 재료로 해서 만든 바닥에 까는 직물을 총칭하는 말이다.
초기의 깔개는 짐승의 모피를 사용했지만 사냥으로 획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대체한 것이 카펫이다. 고대 페르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중서부 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 비롯된 카펫은 보온을 목적으로 시작됐다. 카펫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사막지대나, 산이나 들판에서 여름과 겨울을 지내야 하는 이들에게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장식과 가재도구를 넣는 주머니, 또는 당나귀나 낙타의 안장 덮개 등으로 활용도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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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카펫은 파지릭 카펫(BC 5세기-BC 4세기)이라 불리는 페르시아 카펫이다. 사슴, 말, 기사 등을 묘사했는데, 이는 페르시아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던 아케메네스 왕조(BC 6세기-AD 330)의 문양과 유사하다. 카펫의 기원이 페르시아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란 제2의 도시 이스파한은 페르시아 카펫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페르시아 카펫을 구경할 겸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카펫이 우리를 맞는다. 전시장 한 쪽에는 카펫 제조방법을 보여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상점 주인은 두 명 정도 앉으면 적당할 크기의 카펫을 보여주며 자랑이 그칠 줄 모른다.

카펫의 품질은 디자인의 정교함과 촘촘함으로 결정되는데, 가로 세로 1인치 내에 천 올 이상 들어가야 고급으로 친다. 올을 짧게 잘라내는 것도 필수사항이다. 상점 주인이 자랑하며 보여준 카펫은 진짜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이스파한에서 생산된 100% 실크 카펫인데, 우아한 디자인이 물결처럼 움직이고 색상은 카펫의 움직임에 따라 변한다. 무엇보다 피부 결보다도 매끄러운 감촉이 카펫에 대한 이제까지의 생각을 바꾸게 한다.

카펫은 일반적으로 양모로 만들거나 양모에 비단을 섞어서 만든다. 지난 해 카펫에 관한 한 세계 2위라는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본 카펫은 양모로 만든 것이어서 딱딱했다. 게다가 제작방식도 매우 거칠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이란 카펫과 비교하면 그 격차는 실로 엄청나다. 이곳의 카펫은 가히 예술품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란의 카펫이 오늘날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8천년을 이어온 페르시아 카펫 제조기술의 통합된 응집력인 바, 이는 곧 누천년을 면면히 지켜낸 전통의 승리요, 자존심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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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펫의 문양은 국가와 시대마다 다르다. 카펫의 원산지인 이곳의 문양은 그림보다는 상징을 사용한다. 이슬람은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다. 대부분의 이슬람국가는 수니파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묘사나 표현을 금기시한다. 그리하여 꽃이나 식물을 활용한 추상적 표현이 발달했다. 이란은 시아파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수니파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의 카펫에는 생명체의 자유로운 형상이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꽃과 식물, 동물들의 모습도 화려함과 추상성을 혼합한 예술작품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카펫이 동서문명의 교류품목으로 등장한 것은 파르티아 왕국(BC 248-AD 226) 때이다. 지금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한 이 왕조는 지역의 특성상 동서교역의 요충지로 발전하였는데, 페르시아의 전통적 토착문화와 그리스 로마의 헬레니즘문화, 그리고 중국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카펫도 이때 널리 알려졌다.<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파르티아에서는 양모나 가죽 혹은 야란사(野蘭絲)를 방적하여 사용하고 이것들로 탑등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했는데, 탑등이 곧 오늘날의 카펫이다. 카펫은 동서문명의 주거생활(住居生活)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필수품으로 각광받았다. 생활필수품인 카펫은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중국의 비단이 전래되면서부터는 보다 가볍고 고급스러운 물품으로 발전하면서 부와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6세기 대표 생산지 명성 아시아서 전 세계로 확산

7세기 이슬람시대를 거치며 카펫은 페르시아 전역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카펫이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 사파비조(朝) 페르시아 때였다. 수도 이스파한에는 카펫을 생산하기 위한 왕립직조소가 설치되고 디자이너로 세밀화가를 고용하는 등 디자인과 제작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스파한이 페르시아 카펫의 대표적인 생산지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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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카펫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서역진출이 활발했던 한대(漢代)이다. 이때의 카펫은 장막의 보온, 방풍 외에 미끄럼 방지 등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했다.

카펫이 세련화 귀족화된 것은 실크로드가 왕성하던 당나라 때이다. 이때의 카펫은 중국의 전통 위에 외래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요소를 융합하여 국제적인 문화형성에 기여했다. 이는 활발한 동서교류의 중심지로서 세계문화를 주도하던 당대의 수준 높은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카펫이 서민들에게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송대(宋代)에 이르러서이다. 이때부터 카펫은 실생활의 필요에 따라 벽걸이, 깔개 그리고 걸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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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도 많은 변화를 거쳤는데, 페르시아의 기하학적 문양은 중국으로 유입되어 용이나, 잉어, 거북이 등 부와 장수, 번영을 기원하는 동양적인 상징물로 대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카펫이 생산된 것은 적어도 신라 경덕왕 때인 7세기 이전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경덕왕 때 당나라 대종(代宗)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기술자들에게 명령하여 오색의 카펫을 만들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카펫은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7세기에 이미 카펫 직조기술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카펫이가 전래된 것은 중국이 서역진출에 매달렸던 한대(漢代)까지도 거슬러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카펫은 아시아 지역을 넘어 세계적인 생활품이 되었다. 중서부 아시아에서 시작된 깔개로서의 카펫이 실크로드를 통해 각지로 퍼지면서 다양한 용도로 변화했는데, 이는 인류문명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생활공간의 귀족으로 자리 잡고 인류사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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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박람회에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다면 청마 유태근님의 찻사발 특별초대전이 있었지만, 촬영금지라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청마(淸磨) 유태근(兪泰根)님은 현재 문경대학 도자기공예과 교수이며 대구 공예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역임 하고 경북 산업디자인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역임 가야 미술 대전 초대작가, 구미 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역임 경북 공예품전 경진대회 심사위원역임, 일본전통 공예전 준회원이시고 2002세계도자기 엑스포 초대 워크샵작가, 2003한·중·일 도자기 워크샵(여주)을 주도했습니다.

아쉬운대로 지난 2007년 3월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회의 소개글을 실어 봅니다.

유태근 차 그릇展

선(線)의 의미를 담아 빚은 찻사발 

우리 시대의 표정을 고스란히 담은 우리 그릇을 창조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성을 펼치는 유태근의 개인전이 오는 3월 28일(수)부터 4월 2일(월)까지 대백프라자갤러리 B관 전시실에서 마련된다. 

유태근은 전통도예와 현대 도예의 특징을 절묘하게 접목시켜 한국 도예의 단점으로 지적된 창조성 결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과 창작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와 색채의 다완을 제작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 전통 찻사발이 주는 조형적인 형태인 선(線)에 대한 의미를 담은 작품 60여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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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근은 선의 의미는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은 선(線)의 느낌과 팽팽 하지도 긴장 되지도 않은 선(線), 세련되지도 어리하지도 않은 선(線)의 느낌, 우리의 선(線)은 소박 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선(線), 손에 안았을때 부모님 품속같이 따뜻한 선(線), 모성 본능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선(線)이 우리의 선(線) 이라고 생각 하며 표현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잠시 바꿔어 졌던 우리의 선(線)을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려 놓으려 한다. 우리의 선(線)으로 찻사발을 빚고 그것을 밝히는 빛을 만듬으로써 그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국의 찻사발을 비추어주고 지켜주는 영원한 불변(不變)성을 얻을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차그릇을 만들고, 가야토기라는 전통성 위에 현대 사회의 속도감과 기능성을 가미시킨 차그릇은 새로움에 대한 노력과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창조적 기쁨은 에술을 하지않는 사람은 감히 얻지 못하는 희열일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하는 이번 작품전을 통해 진정한 차그릇의 맛과 멋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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