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로는 이여송, 진린, 조승훈, 두사충, 진유격, 마귀, 낙상지, 동일원, 이승욱 등이 있었습니다.

1. 이여송


자 자무(子茂). 호 앙성(仰城).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 1592년 닝샤[寧夏]에 발배(틋拜)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제독(提督)으로서 이를 평정하였다. 같은 해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2차 원군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벽제관싸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 패한 후로는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해 말에 철군하였다. 1597년 요동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토번(土蕃)의 침범을 받아 반격 중에 전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5대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 사람으로 성주(星州) 이씨(李氏)의 후예라 하며, 당시 조선 주둔중에 조선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지금도 경상남도 거제군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한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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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린

명나라의 수군 장수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연합작전을 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자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고 땅을 치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진린의 손자는 명나라가 망하자 할아버지의 전승지인 고금도(완도)로 망명해와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 가족은 다시 해남도로 갔는데 현재 그곳 진씨들은 진린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관련자료
-이곳 광동진씨는 임진왜란때 구원군으로 우리나라에 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쟁을 치렀던 수군도독 진린 장군의 후예들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는 청나라가 일어나면서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진린의 손자 영소는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켜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망명한다. 영소는 진린이 싸웠던 고금도(완도)를 찾아 칩거하다가 해남으로 와서 결혼을 하여 아들 석문(碩文)을 낳고 생활하다 죽었다.
진린 장군의 증손자인 석문은 여러 곳을 떠돌다 34세 되던 무렵에 황조리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3. 조승훈

조선의 요청과 요동의 정세에 위협을 느낀 명나라는 임진왜란 발발 두달만에 조승훈을 선봉으로 한 3500명의 명나라군을 투입시킵니다. '당장에 일본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조승훈은 한달 후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일본군에게 완전히 참패하고 본국으로 도주해 버립니다.

4. 두사충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대구에 정착해서 살았다.

두사충의 호는 묘명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 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 주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감영을 대구로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 일대로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의 생각나 현 대덕산 밑으로 주거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를 행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후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 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5. 진유격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명나라 군사들이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이 한양에 있는 북악산 꼭대기에 관왕묘를 세우고, 석상을 만들어 앉히고, 석상 옆에 관운장이 자기들과 조선을 도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처음으로 세웠다.


6. 마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사명당(泗溟堂/四溟堂)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7. 낙상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징비록에 이르기를, "게사년 여름에 한성 묵사동에 병을 누었더니 명나라 천장 낙상지가 병들어 누워 있는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조선은 아직도 미약한데 적은 아직도 국경 안에 있으니 명나라 원군이 돌아가기 전에 병법을 연마하여 가히 나라를 지 키십시오' 하였다. 나는 즉시 장계를 올려서 금군 한사립으로 하여금 70여 인을 초모하여 낙상지에게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낙상지는 자신의 장하에서 장육삼 등 10인을 뽑아 교사로 삼고, 창, 검, 낭선 등 기예를 연습하였은즉 낙상지는 이여송제독의 휘하이므로 제독검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왔다."


그 외에도 동일원, 이승욱 등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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