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이 녀석의 꼬리를 거의 잡아채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피해욧!”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람이 깜짝 놀라며 움찔할 때, 등 뒤에서 다가오는 예리하고 음산한 기운이 있었다. 람은 그걸 느끼자마자 급히 몸을 비틀며 팔꿈치와 손목을 돌려 창끝으로 다가오는 기운에 맞서 찔러갔다. 그러나 람이 미쳐 공격 방향을 다 전환하기도 전에 그 기운은 람이 회전하는 반대쪽에서 호선을 그리며 람의 회오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람은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에 멈칫했으나 가미 전사답게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기운이 움직이는 대로 상체를 틀며 관성으로 제멋대로 나아가는 창의 허리에 힘을 살짝 가해 자신을 습격한 기운을 후려쳤다.
뭔가 걸리긴 했으나 그다지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비록 타격을 입히진 못했을지라도 람은 부딪친 탄력과 그 틈을 이용해 몸을 바닥에 한 바퀴 구르며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일어서는 람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습격한 것의 정체를 확인하려는데 자신의 발아래서 꼼짝도 않고 있는 여우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약고, 간교하고, 재빠르던 녀석이 어쩐 일인지 배를 땅에 붙이고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이렇게 겁을 잔뜩 먹은 채 떨고 있다. 람은 천년호리가 처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잡았다. 순간 람이 흠칫하며 놀랐다. 거기엔 거대한 한 마리의 성성이(猩猩)가 씩씩거리며 까만 눈빛으로 천년호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밀림에서 보았던 적갈색의 성성이와 달리 녀석은 눈부시게 깨끗한 흰색 털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땅을 짚은 긴 팔의 손끝에는 붉은 빛 손톱이 길고 뾰족하게 자라 땅을 반쯤 파고든 채 꼿꼿이 서 있었다.
또 털이 없는 얼굴은 사람이라 착각할 만큼 이목구비가 닮았고, 연한 붉은 색 피부도 깨끗했다. 다만 긴 송곳니가 아래위로 삐죽 튀어나와 전체적으로 사나운 인상이었고, 찡그린 눈엔 눈동자조차 검은 색인지 보이지 않아 으스스한 두려움을 주었다.
게다가 보통의 성성이 보다 두 배는 됨직한 키는 람보다 한참 위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잘 발달한 매끈한 근육은 탄탄하고 힘이 넘쳐보였다. 낮게 그르렁거리며 숨을 내쉬는 녀석이 람을 노려보았다. 아마 자신이 노린 천년호리를 람이 가로채려한 것에 잔뜩 골이 난 것 같았다.
게다가 보통의 성성이 보다 두 배는 됨직한 키는 람보다 한참 위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잘 발달한 매끈한 근육은 탄탄하고 힘이 넘쳐보였다. 낮게 그르렁거리며 숨을 내쉬는 녀석이 람을 노려보았다. 아마 자신이 노린 천년호리를 람이 가로채려한 것에 잔뜩 골이 난 것 같았다.
이 성성이 역시 천년을 산 영물로 빠르기가 번개 같고, 손톱은 강철보다 단단하고, 흰 털로 덮인 피부 또한 단단하고 질기기가 견줄 바가 없었다. 천년을 살며 온갖 기화이초와 영과, 독물, 영물들을 먹은 덕분에 자연적으로 체내에 쌓인 기운도 엄청나 손짓만으로도 바위를 부술 정도였다. 또한 거목을 당겨 뽑고, 부러뜨릴 만큼 힘도 대단한 놈이었다. 그리고 유인원의 한 종류답게 지혜도 갖춰 영리하고, 간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녀석이 이미 백년이 넘게 천년호리를 노리고 있었으나 호리 역시 영물인지라 쉽게 잡히지 않았다. 사실 호리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근처를 떠나지 않은 것은 이곳만큼 땅과 하늘이 맞닿아 정순한 기운이 풍부한 곳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곳에는 호리가 좋아하는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나 백년삼(百年蔘), 만년영지(萬年靈芝) 등이 많았다. 그래서 호리는 성성이의 위협 속에서도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년호리가 아무리 영물이라고 하나 성성이 역시 영물이었고, 성성이는 바로 천년호리의 천적이었다. 그래서 호리는 늘 경계하고, 조심하며 성성이와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었다. 그러나 성성이도 호리만큼 영악해서 직접 호리를 몰면 숨어버린다는 것을 알고는 틈틈이 호리가 즐기는 영초가 많은 곳에 숨어 기회를 노리곤 했다. 이번에도 노송 꼭대기에 숨어 며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천녀호리가 나타났건만 난데없이 그 사이에 람이 끼어들어 먹이를 가로채려고 한 것이다.
람이 성성이를 주시하며 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풀고, 다시 가볍게 말아 쥐고는 기운을 은근히 흘려 넣었다. 그때 옅은 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등 뒤로 내려섰다. 람은 조금 전 위기를 알려줬던 목소리를 기억하고는 성성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긴 왜 온 거야?”
말은 딱딱했지만 말투에는 다정과 걱정이 서려있었다. 검우가 피가 줄줄 흐르는 람의 등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누나”
람은 그제야 멍하게 마비된 듯 하던 감각이 풀리며 등에서 심한 통증이 파고드는 걸 느꼈다. 그러나 잠시 움찔했을 뿐 동요치 않고, 창을 성성이 쪽으로 겨누며 오른 손을 뒤로 빼고, 왼손은 거의 창날 코앞을 감듯 쥐었다. 기운이 사납게 모여들며 창은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런데 기운이 급히 몰리는 바람에 길게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깊은 상처엔 다시 피가 솟아나와 옷을 흥건히 적셨다. 검우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성성이 앞을 굳건히 가로막은 람에게서 깊은 정을 느끼고는 뭉클해졌다.
명상에 잠겼던 검우가 눈은 뜬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때 검우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찾아왔다. 검우는 곧 그 허전함이 람 때문임을 알아챘다. 보통 검우가 눈을 뜨면 람이 곁에서 곡식을 주거나 맑은 물을 주곤 했었는데 없었다. 명상이 깊어지기 전 조심스럽게 멀어지는 람의 발소리를 들었었다. 종종 있는 일이라 검우는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깨어나고도 ‘아직 람이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허전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가홀과 둘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검우는 기지개를 활짝 펴고 몸을 풀었으나 여전히 람이 없다는 빈 느낌이 사라지지 않자 동굴을 나와 몇 번 폴짝폴짝 앙감질을 하며 기분을 바꾸려했다. 깨금발로 한발을 휘휘 젖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는 안 되겠는지 자세를 바로하고는 눈을 감았다. 람의 기운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람의 모습을 떠올리고 알고 있는 람의 기운을 떠올렸다. 람이 표독스럽게 사냥감을 몰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운이 느껴졌다. 멀어서인지 흐리긴 하지만 람의 것이 분명한 기운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기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람의 기운은 가홀이나 검우와 달리 독특했다. 아니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원래 검우와 처음 만났을 때 람은 여인이라 믿을 수 없을 만치 패도적이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을 가졌었다. 그러나 가홀의 가르침을 받으며 검우와 수련하자 기운은 점차 굽이치는 강물처럼 웅혼하면서도 봄바람 같은 포근함을 지닌 단을 닮아갔다. 그래서 람은 가미와 단의 기운이 조화를 이룬 특이한 기운을 지니게 되었다.
검우는 람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임을 깨닫고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람 앞에서는 능글맞게 지냈으나 사실은 람을 다정하게 느끼는 부끄럼 많은 소년이었다. 검우는 이런 모습을 누가 보면 어쩌나하며 얼른 고개를 저은 후 일어나 람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한 걸음 두 걸음을 반보도 되지 않은 종종걸음이었다. 그런데 세 걸음이 넘어서자 한 번에 서너 자를 건너더니 다음 걸음 폭은 열자 남짓이 되었고, 곧이어 디딘 걸음걸음마다 땅이 접혔다 펴지기라도 하는 듯 검우가 그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비록 가홀처럼 단 한걸음에 땅을 접을 만큼은 아닐지라도 검우의 달리기 공부는 다른 누구도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람의 기운이 또렷하게 잡혔다. 검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음을 늦추고는 람 앞에서 짓던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기운을 갈무리하여 지웠다. 사냥할 때의 람이라면 감각이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을 것이므로, 검우는 대략 일 리 거리에서 미리 날숨을 멈추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멀리 람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바람에 맞춰 흔들거리며 기운을 한껏 숨긴 채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다. 검우는 들숨마저 끊고는 괴발디딤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람이 사냥감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검우가 다가서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십여 보를 더 다가갔을 때 땅에서 시작된 움직임과 그 움직임을 앞질러 람이 창을 쪼아 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냥감이 튀어 오른 모양이다.
검우는 람이 사냥감에 몰두한 틈을 타 걸음을 빠르게 하여 다시 이십여 보를 다가갔고, 람이 가지를 차고 매처럼 쏘아져 나가는 걸 보며 그 기세와 움직임에 감탄하였다. 검우가 왼발로 땅을 비스듬히 차고, 오른발은 뒤꿈치를 회전하듯 젖히며 뛰어오르자 상체가 오른쪽으로 반 바퀴 회전하여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가 되더니 긴 직선을 그리며 쏜살같이 나아갔다.
람과 불과 사십여 보 거리였다. 그 사이 람의 창이 사냥감을 휘감았고, 이제 람이 달아나는 사냥감을 채가는 중이다. 그때 검우는 보았다. 람은 사냥감에 자신은 람에 몰두한 나머지 보고 느끼지 못한 것이다. 람이 걸치고 있던 나뭇가지 보다 한 단 더 높은 가지 위에 교묘하게 숨은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나무와 하나인 듯 일체감을 가진 무언가는 람이 사냥감을 거의 잡아챌 쯤 바람처럼 움직였고, 검우는 그걸 보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검우는 기운을 급박하게 끌어들이며 공간을 확 잡아 당겨 접었다. 그리고 공간이 펴지기도 전에 소리쳤다.
“피해욧!”
검우는 기운을 최대한 북돋우며 허공을 힘껏 발로 찼다. ‘펑!’ 소리와 함께 검우의 몸이 탄력을 받아 튕겨 나가면서 거리를 단축했다. 그러나 너무 멀었다. 다행히 람이 즉각 반응하기는 했지만 흰 그림자가 남긴 긴 호선을 따라 붉은 핏방울이 함께 퍼지고 있었다. 람이 바닥을 굴러 거리를 벌려놓았다. 흰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으나 검우는 놀라지 않고 속도를 빨리하며 숲에서 받은 기운을 모아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걱정스런 마음에 호흡이 흐트러지며 기운의 흐름이 고르지 못했지만 검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제로 허공을 접어갔다. 갑작스런 검우의 출현에 놀랐는지 흰 괴물은 재차 공격하려던 팔을 풀어 땅을 짚고 경계했다.
람의 뒤로 내려서자 옷을 찢고 등을 갈라놓은 세 개의 긴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거칠게 파인 상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람이 딱딱한 말투로 나무라듯 말했지만 검우는 람의 마음 씀씀이를 알고 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자신과 흰 괴물 사이에 버티고 서서 여차하면 단박에 괴물을 죽여 버릴 듯 굳세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누나”
람은 검우의 말에서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성성이는 람과 검우를 번갈아 노려보더니 천년호리를 보며 위협하듯 으르렁 거렸다. 그러자 천년호리는 영악한 머리가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발 떨더니 네 발을 펴 배를 땅바닥에 바싹 붙이고는 강아지 새끼처럼 낑낑거렸다. 성성이가 무언의 협박과 기세로 호리를 꼼짝 못하게 눌러 놓으려는 모양이었다. 람은 그런 천년호리를 흘깃 본 후 창을 다시 고쳐 잡았다.
람은 속으로 감탄하며 창의 앞부분을 잡은 왼손을 퍼뜩 떼고,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만으로 창대를 잡으며 손목을 부드럽게 감아 창이 자연스럽게 각도가 틀리도록 한 후, 그 끝을 달려드는 성성이의 머리로 향하게 했다. 성성이의 긴 손톱이 람의 몸에 닿기도 전에 람의 창끝이 성성이의 눈 사이를 정확히 찍어버리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성성이의 몸놀림은 예사가 아니었다.
오랜 수련을 거친 뛰어난 전사처럼 성성이는 상체를 뒤로 젖혀 머리가 창의 범위를 벗어나도록 하며, 두 손은 거둬들여 땅을 힘차게 짚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내달리던 힘을 이용해 두 발을 띄워 람의 무릎과 목으로 빠르게 발길질했다. 그것도 람의 하체를 노린 발길질은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서 했고, 상체를 노린 발은 휘어 차는 공격이었다. 아무리 영물이라 할지라도 수법의 정교함은 람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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