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소리 4

2008. 9. 13. 18:20


-나팔소리 3편에서 이어집니다.

나팔소리 4

한 낮에도 희미하지만 총총하게 빛나는 별무리를 볼 수 있었다. 계산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렇게 환상적인 우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한 편으로 생각하면 행운이었다. 무엇이든 그 마지막은 가장 화사하고 밝게 빛난다는 말처럼, 밤이되면 극지방이 아닌 어느 곳에서도 녹색과 황록색과 적색과 청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오로라(aurora)를 볼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가 지구 자기장에 이끌려 왔다가 공기분자와 반응하여 빛을 내는 현상이 아니므로 오로라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찬란하고 황홀한 빛무리를 무엇이라 부른들 무슨 상관인가.



지구가 우주가 모두 붕괴되는 이 순간이 아니라면 저 멀리 태양계 전체가 오로라에 겹쌓인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농축되기 시작한 입자와 모든 방향에서 빼곡히 날아드는 광자들은 서로를 방해하며 우주에 아름다운 환상을 수놓고 있으며, 태양은 한결 더 밝게 일렁이고 있다. 회전하고 요동치고 있을 우주지만 현재 보이는 우주는 오직 아름다울 뿐이었다. 반복적으로 높아졌다 낮아지는 나팔소리가 다시 신인류를 괴롭게하고 있지만 그 소리는 아득한 심연에서 들려오듯 메아리쳐서 처음 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점점 인류가 느낄만한 소리가 들려오는 파동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은 파동을 반사시키는 대척점(antipodes)들이 서로 가까워지기 때문이리라.

이미 태풍의 눈을 넘어서고 있는 지평선의 내피는 모든 현상과 모든 힘과 모든 질량을 하나로 만들며 짓쳐 들어왔고, 한발 앞선 수십 광년 두께의 입자 폭풍은 주변의 항성들과 반응하며 군데군데에서 감마선 버스트(Gamma-ray burst)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격렬해지던 우주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잠잠해 졌다. 또 다른 힘이 우주의 의지를 막아선 것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감마선 폭발에서 신인류와 지구와 태양계를 지켜 주었던 미지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이 놀라운 기적에 신인류는 기뻐하며 이것이 자연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그리고 우주의 섭리와 의지에 의한 것이라면 이 현상을 가능케한 도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활발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나팔소리가 울린 이후 절망만 하던 인류에게 희미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고대의 철학에서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고대 브라만교에는 브라흐마와 비슈누와 쉬바라는 세 신이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브라흐마는 세상을 창조하는 신이고, 쉬바는 세상을 징벌하며, 비슈누는 세상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창조와 보존과 파괴는 같은 이치이며, 세 신은 역할이 다를 뿐이고 결국은 하나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이며, 그 창조는 유지를 위한 것이며, 유지하기 위해서는 파괴를 해야만 한다는 사상을 품고 있는데, 시공간은 그들의 논리처럼 세 가지의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들은 서로 절묘하게 상충하고 상쇄하는 연속체라고 볼 수 있다. 브라흐마가 빅뱅이라면 빅크런치는 쉬바의 역할인데, 우주는 창조되고 그 모습이 완성되는 순간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비슈누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가 가지는 본질은 세 가지 현상을 하나로 보고 있고, 그 세가지 현상은 공존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의지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유지와 보존을 담당하는 비슈누의 일이 남아있다. 이미 태양계를 제외한 우주의 대부분은 파괴되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에테르(ether)와 융합된 우주의 무게는 물질계 전체의 100억배가 되었다. 그럼에도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지구는 따뜻하며, 우리는 숨쉬며 살아있다. 완벽히 둘러싼 블랙홀의 중력이 주는 무게감도 느낄 수 없었고, 그것에 의한 절대적인 어둠도 없다. 비슈누는 이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파괴와 창조로 부터 우주의 중심을 지키며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미 200년 전에 그 존재와 무게가 알려졌지만 정확한 역할이 없어, 물질계 질량의 96%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물질이 있다. 빅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암흑물질 암흑에너지는 우주에 왜 존재하는 것일까? 물론 만유인력과 반대로 서로를 밀어내는 척력 에너지인 암흑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우주는 가속해서 팽창을 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물질계가 회전력을 얻고 서로 영원한 팽창만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주가 영원히 팽창을 하든 순식간에 수축을 하든, 그것은 물질의 총체적 질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우주를 계획한 의지라면 물질의 질량을 조절하면 되지 굳이 암흑 물질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3%의 암흑물질과 73%의 암흑 에너지와 4%의 수소와 헬륨 조금, 그리고 0.000000..1%의 나머지로 물질계는 구성되어 있다. 물질계의 거의를 차지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것은 단순히 빅뱅의 부산물이 아닐 것이다. 1만도가 넘는 뜨거운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지금껏 4%의 물질계의 눈을 속이며 잘도 숨어 있었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거시적인 역할만 해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암흑물질은 어떤 역할을 부여받고 물질계에 잠입해 거대한 덩치를 숨겨온 것이 분명하다. 무게감은 있으나 존재감이 적은 암흑물질은 비슈누다! 그것은 비슈누의 도구이며, 비슈누의 실체이며, 비슈누 그 자체인 것이다.

비슈누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던 아틀라스(Atlas)처럼 에테르와 물질계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있었다. 지름 400억 광년의 우주속에 스며있던 암흑물질은 우주가 수축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버티고 서서 외부 힘의 속도에 따라서 작용하는 관성저항(inertial resistance)이 되어 수축속도를 줄였으며, 우주의 중심이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만큼 압축되었지만 그 고유의 탄성으로 블랙홀(Black Hole)을 힘을 배척하는 역할을 했다. 우주가 수축하기 전에는 큰 역할이 없는 암흑에너지에 대하여 수백년 전에 천재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외부 힘이 작용하는 상황에서만 운동을 시작하는 질점'이라는 표현으로 -물론 암흑 물질을 이른 말은 아니었지만- 잘 설명해 주었던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거시 세계에 적용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블랙홀의 지평선이 오로지 물체를 빨아들이기만 하는 반면, 암흑물질은 빛의 속도로 접근하는 그 어떠한 물체도 지평선을 결코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화이트홀(white hole)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우주의 무게와 맞먹는 블랙홀의 회전력도 결국 압축된 암흑물질의 관성저항에 부딪쳐 웜홀을 생산해 낼 수 없었으며, 서로가 더 이상 얇아질 수 없을 만큼 수축되고 붕괴되었지만 태풍의 눈이자 중심인 태양계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도 없었다. 상반되는 두 힘의 대부분은 절묘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상쇄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으로 소멸되었고, 일부의 미세한 물결이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을 일으키며 보호막을 넘었지만, 그 파동은 역치값이 너무 커져 버렸기에 태양계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우주는 그 상태 그대로 평형을 이룬채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멈추는 것일까? 이것이 수축의 마지막이라면 처음부터 파괴와 창조를 반복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서있는 우주의 조그마한 부분이 이렇게까지 보호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분명 다음 단계의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지구를 제외한 곳은 시간이 검게 죽어 있으며, 우주는 오직 시체로만 존재할 뿐이고, 죽음과 삶의 사이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쳐져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안도가 되지 못했고, 그들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과 현상을 치밀하게 기록하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나가야했다. 어떤 무엇으로도 관여조차 할 수 없었고, 행여 무엇을 한다고 하여도 그 행위는 그 무엇에도 영향을 줄 수 없었기에 관찰과 확인과 기록만이 신인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천년이 흘렀다. 우주의 크기는 태양계의 크기가 우주 크기의 99.99...%가 될 만큼 축소된 채 고정되어 있었고, 팽착력과 수축력은 서로의 견제에 의한 나름대로의 질서가 잡혀 있다. 천년이 지났다지만 시간에 대한 개념은 오직 태양계만이 물질이 일반적인 물질의 상태와 비슷하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우주를 기준으로 할 수 없는 독립된 공간의 독립된 시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천년이라는 시간이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원자가 흡수하는 전자기 에너지의 주기와 동기(同期)하는 원자시계(atomic clock)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에, 시간은 스프링의 탄성에너지를 축적해서 사용하는 태엽시계를 이용해서 계산해야 했고,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알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하다고 해도 하루의 기준이 되는 태양계의 운동주기는 많이 달라져 있으므로 인류가 오랫동안 써왔던 시간 개념에 대치(代置)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공전주기를 일년으로 잡는다면 시간은 천년이 아니라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인 것이다.

그 천년같은 하루 동안 신인류는 자신들의 역할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물질계의 마지막 형태인 최외곽의 블랙홀과 그와 교착상태(deadlock)를 이루고 있는 암흑물질계 그리고 그 핵을 구성하고 있는 태양계는 공존인지 공생인지 모르는 상태로 이어왔고, 이제 천년왕국은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두개의 상반된 힘의 교착은 서로의 자원을 획득할 수 없는 비선점(No preemption)이자 할당된 자원을 가진 상태에서 다른 자원을 기다리는 점유대기(Hold and wait)이었고, 인류는 그 힘의 균형을 깰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인류의 역할은 태초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지난 수천년 동안 밝혀왔던 우주에는 정교한 수학적 질서가 있었으며, 우주를 계획하고 창조한 -마치 브라흐마같은- 의지는 초월적인 숫자 속에다 어떤 메시지를 감추어 두어서 137억년이 지난 후에 아주 총명한 생명체가 진화해 나오면 그걸 해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제 인류가 그 메시지를 해독할 차례가 된 것이다.



현재의 불규칙해 보이는 -아니 사실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가 그랬을 것이지만- 우주는 숫자와 조화를 이루면서, 창조자의 선견지명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고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형태는 계획을 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 밑그림처럼 존재하고 있던 숫자의 지배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었으며, 그에 의해 파괴와 창조의 경계점은 이루어지고 결정되는데, 새로운 질서로의 역할자로 인류가 선택된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런 우주 절대자의 행함을 관찰해줄 유일한 증인으로 선택된 것이다. 어쩌면 인류 그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우주의 의지며 비슈누며 쉬바며 브라흐마일지도 모른다. 신인류는 천년 동안 그 의지를 고찰하며 그 진실을 고뇌해 왔기에 이제는 그 뜻과 자신들의 나아갈 바를 알수 있었다.

조건없는 빅크런치와 빅뱅이라면 지금 우주와 다음 우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상태가 될 것이고, 때론 한 우주의 최후가 반드시 파괴와 창조로 이어지지 못하여 영원히 팽창해 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신은 그 우주의 마지막 존재에게 새로운 우주의 모델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인류는 그 사명을 이해할 수 있었고, 우주에 대한 창조자의 애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계획과 예측과 실험을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원래 태양의 질량 정도로는 결코 크기 0으로의 소멸이 일어날 수 없으나 지금은 우주의 균형이 워낙 섬세한 상태이므로 작은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그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민감한 초기조건에서는 작은 요소의 차이에도 그 결과의 차이가 엄청나게 되므로 단 한번만 실행할 수 있는 태양의 소멸 계획은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의 뜻, 약간의 비애감과 서글픔.

천년의 끝자락에 다시 한번 나팔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 나팔소리는 우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류가 우주를 향해 쏘아올린 것이었고, 종말의 경고가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현 우주의 마지막이 되는 태양계가 0의 특이점으로 접근하는데 걸린 시간과 그 특이점이 암흑물질과의 경계였던 10만AU(astronomical unit)까지 확장하는데 걸린 시간은 각각 10의 -10승 초도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시간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었다. 우주 전체 질량의 1조분의 1도 안되는 작은 폭발이 그 시작이었으나 내부로부터 시작된 그 혼돈(chaos)은 압축된 모든 에너지를 촉발시키는 임계(臨界)가 되기에 충분했으며, 암흑물질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축 후 본래의 성질인 탄성으로 강대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우주를 팽창시켰다.

새로운 우주는 이전 우주의 자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 않았으며, 개입된 이전 우주의 의지와 계획대로 아름답고 좀 더 질서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인류가 가졌던 마지막 감정은 전 우주에 고스란히 녹아있어, 그로부터 137억년 후에 나타난 총명한 생명체는 우주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비애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어느 날, 머리 깊숙한 곳에서 재그러운 쇳소리가 계속들린다면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조(兆)년 동안 백 억(億)번을 반복해왔던 심판과 종말의 날을 알리는 경고의 소리이며, 새로운 우주를 계획할 자(者)를 위해 예비된 천년왕국의 문을 여는 나팔소리인 것이다.
-끝-


그림출처 :
L'impératrice Nocturne

- 지루했을 수도 있고, 황당하기도 했겠지만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픽션임을 밝혔음에도 마치 필자가 가진 사상이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네요. 읽는다고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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