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위키피디아에서는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 집계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품이 1억부 넘게 팔렸을 것으로 보이는 작가들을 발표했는데, 1억부 클럽에 포함될 것이라고 보는 작가는 100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햄릿의 셰익스피어와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같은 전 시대의 작가를 비롯해서 애거사 크리스티, 시드니 셸던과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돌킨, 존 그리셤과 스티븐 킹, 해리포터라는 단 한 개의 시리즈로 3억부를 넘긴 조앤 롤링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100명의 작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작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바로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 등의 무협소설(武俠小說)로 동아시아권에서 널리 알려진 김용(金庸)입니다.

지난 2000년,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州週刊)에서는 내로라하는 중국 문학 전문가 14명의 심사로 ‘20세기 중국 소설 100강(强)’을 발표했는데, 이는 중국 본토와 대만·홍콩 작가는 물론 해외에 체류 중인 화인(華人) 작가의 작품 500편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선정은 판매 부수는 고려하지 않는 작품성과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했으며, 국내외 중국 문학 전문가 사이에서 ‘아주주간 100강’은 현재 가장 권위 있는 20세기 중국 소설 자료로 통하고 있습니다. 판매부수가 아닌 작품성만을 기준으로 하는 100강에 김용(金庸 Jīn Yōng)의 무협소설인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29위)과 녹정기(鹿鼎記 31위)가 들어있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신필(神筆), 호협지사(豪俠之士), 대협(大俠), 대종사(大宗師) 등 무협지에서나 들을 법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김용(金庸)은 20세기 후반 중국문학에서 독특하고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 작가입니다. 본명은 사량용으로 1924년 절강성 출생이며, 상해 동오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사에서 편역과 편집을,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 및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1959년 홍콩에서 명보기구를 창설하여 신문, 집지 및 서적을 출판하였고, 1955년부터 집필한 무협 소설은 당시 가장 환영받는 문학작품이었으며, 그 외에 그의 정치 평론과 역사 저술도 매우 추앙받았습니다. 1981년 영국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을 받았고, 1986년 홍콩대학에서 수여하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최근에는 80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당나라 궁정 쿠데타(현무문 사건)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통과하고 박사 과정에까지 진학하여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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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작품들은 다채롭고 강한 개성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웅장하면서도 치밀하게 짜여진 사건들이 시시각각 빠르게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어서, 첫 장을 넘기면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감히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깃들어 있습니다.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중국 역사서를 수차례 통독한 김용의 작품에는 넓고도 깊은 지식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보고 있노라면 등장인물들이 종횡무진 거침없이 역경을 뚫고 나가는 웅혼한 영웅의 기개와 호쾌하고 자유 분방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김용은 1955년 처녀작인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을 발표하고, 1972년 마지막 작품인 녹정기(鹿鼎記)를 완성하기까지 17년 동안 15부에 달하는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녹정기를 완료한 후 김용은 더 이상 무협소설을 쓰지 않겠다며 절필을 선언했고, 이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작품들을 개정한 김용작품집만 출간하고 있습니다.

1955년 -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1956년 - 벽혈검(碧血劍)
1957년 - 사조영웅전(射?英雄傳) 
1959년 - 신조협려(神?俠侶) 
1959년 - 설산비호(雪山飛狐)
1960년 - 비호외전(飛狐外傳)
1961년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1961년 - 원앙도(鴛鴦刀)
1961년 -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1963년 - 연성결(連城訣)
1963년 - 천룡팔부(天龍八部)
1965년 - 협객행(俠客行)
1967년 - 소오강호(笑傲江湖)
1970년 - 월녀검(越女劍)
1972년 - 녹정기(鹿鼎記)

올 해에도 그는 6년을 투자하여 여러 작품들의 내용을 대폭 개정한 3차 작품집을 내놓았는데, 사조영웅전에서 황약사가 매초풍을 구출해 제자로 삼고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은 원작에서 끝까지 사별한 부인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무림을 떠돌다 사라지는 황약사와 달라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85세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해 독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실로 존경할만 합니다. 김용은 홍콩의 중국반환 후에 본토에도 널리 알려지며, 그의 소설을 연구하는 김학(金學)이라는 학문이 생길 정도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김용의 마지막 작품인 녹정기는 무협소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소보(韋小寶)라는 파격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해학과 풍자가 풍만한 필치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재치와 영악함에 독자는 작품 곳곳에서 폭소를 터트리기도 하고, 미묘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뜻을 헤아리다 보면 두고두고 미소를 머금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위소보를 중심으로 흐르는 사건들의 정교한 구성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배합시켜 놓았기에, 사실이 허구같고 허구가 사실같아서 책을 덮은 이후에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기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소년 위소보(韋小寶)가 우연히 강호의 호걸 모십팔을 돕다가 청나라 황궁에 들어가면서 장황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위소보가 어린 태감을 죽이고 그로 가장한 것도 자신이 살기위한 행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친구인 모십팔이 도망갈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데, 작품 곳곳에서 위소보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자신을 위해 한 행동임에도 묘하게 대의와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녹정기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을 무렵의 시대상과 역사성, 당시을 살아가던 한족과 만주족의 갈등, 그 사이에 끼인 일반 백성들의 심리 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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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소보는 청나라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친구임에도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오배를 죽이므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치 아래 천하의 영웅과 호걸들이 모인 천지회(天地會)의 회주 진근남의 제자이자 청목당 청목향주가 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당시 세력을 떨치는 신룡교의 교주의 신임을 얻어 가장 높은 지위인 백룡사가 되고, 소림사에서도 방장의 사제라는 높은 배분이 되어 유서깊은 오태산 청량사의 주지승이 되기도 합니다. 또 신룡교에 쫓기다가 우연히 만난 아라사(나찰국 러시아) 공주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고 그녀를 섭정황제로 세운 공으로 러시아의 대관이 되어,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합니다.

위소보는 강친왕이나 여러 중신들을 비롯해 관직이 낮은 사람과도 가리지않고 의형제를 맺거나 호형호제하면서 비위를 맞추며 자신 안위를 도모해 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번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교묘한 말로 적을 오히려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원래 위소보라는 인물은 일자무식에 언행이 경박하며 무공도 보잘 것 없는 무뢰한이지만, 오만하지 않고, 안하무인하는 성품도 아니며, 사조영웅전의 곽정처럼 의에 대하여 지나치게 고지식하지도 않습니다. 칼날로도 뚫을 수 없는 보의를 늘 옷속에 입고다니며 날카로운 비수 한자루와 잔꾀로 무림의 고수를 물리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지만, 천생이 야멸차거나 독랄하지 못하여 종종 감정에 휩쓸려 영웅흉내도 내고,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속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잘대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의리는 지키는 인물이기에, 반청복명을 배신한 정극상 등을 죽여 천지회 형제들을 구하기도 하고, 사십이장경을 모두 모아 보물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강희제(康熙帝)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청나라의 용맥을 끊을까봐 끝내 보물에 손대지 않습니다.

(※위소보 스스로 자신의 삼대비기이라고 이르는 것은 보의, 비수, 미혼약이며, 삼대절기는 석회뿌리기와 벽뒤의 적찌르기, 그리고 서독 구양봉이 만들었다는 화시분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네가지 보물을 비수와 보의, 도망치는 능력과 옆에서 지켜주는 쌍아라는 여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김용 스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을 만큼 녹정기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무협소설처럼 주인공이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공을 연마하여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과정도 없고, 위소보 스스로가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인물조차 거의 없습니다. 위소보는 천지회 총타주인 진근남이 제자로 삼아 무공을 전수해주려 하고, 소림사에서 고강한 무공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 데도, 그것을 귀찮아할 정도로 게으르고 의지가 약한 인물이며, 말과 행동 어느 하나 경박하지 않는 것이 없는 뒷골목의 무뢰한입니다. 그럼에도 위소보는 간교하지만 친근하고, 영악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입니다. 녹정기에서 김용은 다른 작품과 같이 여러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일일이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작품 전반에는 전장을 누비며 싸우는 영웅들의 호쾌한 기개와 권력 아래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물들의 비분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녹정기는 10여년 동안 햇수 만큼 읽은 작품이지만, 읽을 때마다 여전히 재미있으며 그 느낌이 새롭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본 받아야 할 인물이 위소보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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