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2009. 1. 31. 02:29



약간의 술기운이 남아있었고 잠이 덜 깨인 몽롱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소리? 소리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의사전달이 내 뇌리에 직접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의 소통 수단은 너무나 깨끗해서 잡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한 언어이었기에 저절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맑은 그의 수단에 놀라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꿈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곧 그 소리는 나를 다시 일깨웠고, 그가 전달하려는 것이 들리고 보이며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게 이런 침착한 면이 있었다는 점에 놀라면서 천천히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다른 손에 들린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흠.. 그러니까 당신은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말이군요."
굳이 소리로 말하지 않고 그 대상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말이라는 간결하고 함축된 수단을 통할 때에야 비로소 대화한다는 느낌을 받고, 또 상대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생각은 소리로만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서, 마치 3D 영화관의 한 가운데 서있는 듯, 생생하게 여과없이 전달되는 그의 생각을 강제적으로 경험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모든 정보는 너무나 명백하고 순결해서 한방울의 거짓조차 섞이지 않은 순수한 정보임을 알 수 있었다.



불과 1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넘치는 강물처럼 통제되지 않는 압도적인 정보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속으로 흘러들었기에 반쯤 남은 담배가 매운 연기를 내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수천시간이나 흘렀을 것이라는 착각을 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이 밀려드는 정보에 5분도 지나지 않아 미쳤거나 머리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생각과 의사는 완벽하리만치 선명해서, 주입된 작은 한 조각의 정보라도 생생히 기억되어,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면 그와 연관되는 많은 정보, 즉 소리, 위치, 색감, 온도와 습도, 밝기와 명암, 모양, 바람이나 울림 등의 5감이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겨우 담배 한 모금을 내뱉으며, 겨우 1분 동안 밀려들었지만 사람이 살아가며 수십년간 축적해야 얻을 만큼의 정보를 정리하면서 그가 전달하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대답했다.
“당신의 생각은 나 같은 인간이 인식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군요. 물론 당신의 말처럼 우리는 정보의 저장능력이 매우 낮고, 정보를 분석해서 인지하는 능력도 유치해서, 시간적, 공간적인 측면 어느 쪽에서도 전체 현상의 극히 일부분만을 지금이라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담배를 비벼 끈 후,  아직까지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홀짝거린 후 말을 이었다. 다행히 그는 나의 다음 말이 있기까지 새로운 정보를 밀어 넣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기다려 줄 테니 편안하게 이야기를 계속해라. 너의 이야기는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 있으며 흥미롭다”는 식의 그의 생각은 회색빛으로 백그라운드에 깔려서 은근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기다리는 그 몇 십초의 시간을 나에게만 온전히 할애해준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고차원적인 존재인 그에게는 우리 기준의 수십 초의 시간을 영원과 맞먹을 만큼 방대하게 쪼개서 인지할 능력이 있을 것이므로, 내가 커피를 홀짝거리는 그 시간동안 그의 또 다른 실체는 우주의 수천만의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대에서 다른 무언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와 대화중인 그는 본체와 연결하기 위한 백억 개의 터미널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신이 아니라 본신이며 나는 백억 개의 입출력 단자중 하나를 통해 그와 직접 연결되어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안정을 찾은 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곧 솔직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존재가 아닌 우리, 그리고 우리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즉시 이루어졌고, 나는 다시 또렷해지는 정신을 유지한 채 미친 듯이 밀려들고 쌓이는 그의 의사를 주입받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뇌가 혈류의 상당수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방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에서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는 99%의 피가 머리로 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도 그것이 재미있는지 살짝 웃는다는 느낌이 정보에 섞여 들어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당신', 아니 '당신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즉 당신들의 시간 기준으로 보자면 나른한 오후 한때에 현실을 비추는 햇살이 만들어낸 실체의 이면에 길게 늘어난 그림자이며, 그 실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만 ’그곳‘에 존재하는 허상이라는 것이죠?”
나는 급히 말을 정정했다.
“허상이라는 것이군요."
질문형의 문장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방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그가 전해진 정보의 모든 것이 그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허상을 만드는 실체가 이제 곧 ‘그 곳’을 떠나게 되어, 이 세계... 이 우주가... 곧 사라진다는 것인가요?”

이 말은 질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그의 의도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 질문은 곧 나 자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말을 통해 정보를 정리하고 확인하는 것은 인류의 고유한 정보 기억 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인식한다는 것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말한 그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내가 내입을 통해 그것을 정리해서 말로 표현하면서 나는 그 사실을 현실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말의 뒷부분은 조금 떨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알 수 없는 자존심이 생기면서, 곧 나와 이 세계의 종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식의 인상을 주려는 듯 다음 말을 담담하게 이어갔다.

“그런데 그것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가 증발하듯 사라진다고 해도, 그림자에 아쉬움을 가질 ‘그 누구’도 없을 것이고, 또 이 세계의 존재들은 일말의 비애감을 가질 ‘시간’조차도 없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는 나의 조금 퉁명스러운 질물에 대하여 놀랍게도 짧고도 간결한 ‘언어’, 즉 우리가 사용하는 불완전한 언어인 '말'을 사용해서 대답했다. 그의 미려하고 순수한 말은 머리가 아니라 귀를 통해 들려왔다.



“물론 자네의 말대로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것이고,그럴 이유도 없다네. 이와 같은 그림자의 세계는 매 순간마다 수없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으며, 이 세계가 존재해왔던 유구한 시간이란 것도 사실 ‘우리‘의 기준에서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는 잠시 나의 반응을 살피는 듯 뜸을 들였다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이런 그림자의 세계는 그 그림자를 만드는 실체에 따라 그 형태와 크기와 그 속에 담긴 정보가 모두 다르다네.”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지 않았고 상냥함과 친절이 배어 있어서, 마치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는 연인의 음성처럼 듣기가 좋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 완전한 소멸은 아니라네. 우리의 현실에서 그림자는 실체가 가진 정보의 일부를 반영한 것이며, 어느 세계 어느 우주에서든 정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멸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 즉 이 세계는 실체에게서 복제된 일부의 정보를 고스란히 가진 정보 알갱이, 정보 입자가 되어 우리의 현실의 일부를 이루게 되는데,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나는 다시 한 개비의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는 내가 떠올린 의문을 읽었겠지만 내가 직접 질문하기 전까지 내가 불쾌해지지 않도록 결코 그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생각대로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배려할 줄 아는 친절한 존재였다. 잠시 숨을 들어쉬면서 그 생각을 정리하고는 담배 연기와 함께 말을 뱉었다.

“결국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개성이 사라져 마치 컴퓨터의 기억회로처럼 정보를 구성하는 값의 일부가 되는 것이군요. 하나의 비트는 의미가 없지만 그 비트들이 모였을 때는 그것들이 정보를 구성하는 것처럼, 이 세계는 하나의 정보 알갱이가 되고 우리 모두는 의미 없는 존재로 고정되어 버린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진작부터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그리고 그가 기다리고 있는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내게 알려주는 것입니까?”
그는 예의 그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다면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스위치지. 이 세계가 사라지는 순간 이 세계는 경직되며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모든 정보는 그대로 고정되게 되는데, 정보를 필요로 하게 될 때 이 세계를 다시 켤 스위치가 필요하고, 그 스위치가 바로 자네라네.”



갑자기 주변이 허전해지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 소음들이 들려왔다. 저 멀리의 자동차 경적소리와 경쾌한 목소리로 진행되고 있는 TV의 뉴스 소리와 낮게 그르렁 거리는 고양이 소리와 햇살이 창문을 부딪치는 소리..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의 소리였다. 그리고 아득한 곳에서 울리는 듯 멀어지는 그의 짤랑거리는 웃음소리는 다분히 연출된 듯 했지만, 듣기에는 좋았다.

다 타버린 담배를 끄고는 다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줄담배가 아주 해롭다는 경계심이 무의식중에 떠올랐지만, 곧 쓴 웃음을 지으며 불을 붙였다. 그러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는 남은 커피를 급히 머금고 일어나 후다닥 옷을 입었다. 그리고 변함없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2012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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