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문명의 선각자 1편에서 이어집니다.


절대 성역이던 그곳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저들은 그곳을 '지구'라고 칭하고 있었고, 다른 여타의 문명들과 달리 워낙 고립된 상태에서 자라난 문명이라서 매우 배타적인 면이 적잖았으나, 외로웠던 만큼 다른 누군가가 더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주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하였다. 저들은 먼저 가까운 행성을 샅샅이 탐색하며 생명의 흔적을 찾았지만, 이미 십억 년 전에 선각자들에 의해 깨끗하게 지워졌기에 문명과 생명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저들은 실망하지 않았고, 주변 수십 광년 이내에 있는 모든 항성 주변을 향해 줄기차게 라디오 신호를 보내고, 메신저를 보내기도 했다. 워낙에 철저하게 지켜진 반경 백 광년이라는 성역 덕분에 저들은 문명이 바글거리는 은하계에서도 외롭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제야 그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겐 그보다 먼저 지구에서 성장했던 선각자들이 가졌던 지혜와 한량없는 평화로움은 없지만, 대신에 강력한 탐구욕과 두려움에 대한 도전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때로는 위험을 차초하게 될지라도 그것은 저들에게 무궁한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거기에 저들은 모든 지성들이 주변의 다른 종족과의 경쟁 속에서 성장하다가 안정과 평화를 찾은 후에야 고찰하게 되는 자아에 대한 의문을 문명의 태동기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들은 오래전 척박한 시절부터 그 해답으로 선민의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쩌면 의식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자신들이 선각자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혹은 실제로 선각자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태동한 새로운 문명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 저들의 고대 사상이나 종교와 철학의 대부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가 자신들을 돕는다거나 자신들이 그 하늘의 존재와 닮은 형상이라는 논리가 들어있으며, 마침내는 하늘의 존재와 동질시 되는 구원이나 해탈, 등선(登仙) 등의 결과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주변을 인지해서 내가 어느 위치에 어떤 입장에 놓여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주위를 하나씩 인지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들을 이해하고 깨달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나가 듯이, 저들은 이제 지성에 눈을 뜨고 우주를 바라보며 그 속에 놓인 자신과 자신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이어진 다른 현상들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해하므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들은 아직까지 스스로 정해버린 기술적인 한계, 정확히 말하면 관념적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우주의 그 어떤 문명보다 더 빠르고 현란하게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었지만, 저들은 아직까지 우주를 인지하는 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땅에서 오래 전에 살았던 선각자들이 우주의 본질을 예리한 시선으로 꿰뚫어 보았던 것에 반해, 저들은 그 본질보다는 왜곡된 현상을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살피고 있다. 대부분의 문명이 행성을 벗어날 수준에 달하면 곧장 광속이라는 표면적 현상을 파악하고 쉽게 그 벽을 넘는데, 저들은 다른 문명보다 수백 배나 빨리 그러한 기술수준에 도달했음에도 여전히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다.

광속을 뛰어넘는 데는 그리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속도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두 지점을 통과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가에 대한 상대적인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두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 반드시 물질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관념은 순식간에 두별 사이를 꿰뚫는다. 관념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개념인 것이다. 나의 주관이 직관하는 대로 우주의 현상은 관찰되고 형성되는 것이므로, 관념은 실제 우주를 형성하는 힘으로 중력이나 관성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왜 물질에 집착하여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인가? 물질이란 쪼개어보면 결국 우리가 인지하기 위한 단위로 되어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국 모든 물질은 어떤 방식으로 인지하느냐에 따라서 실존여부와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저들은 광속으로 달리는데 반드시 무엇인가 실재하는 물질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그에 따라 그것을 추진하기 위한 힘을 찾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은 -주관적으로- 관찰된다는 의미 외에는 없는 것이다. 광속이나 혹은 그 백배의 속도로 달린다고 할지라도 그때 받는 압력이나 그것에 어찌 대응해야하는 지를 걱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주는 인지하는 주체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게 인지되기 때문이다.

저들은 아직까지도 실존하지 않는 힘인 중력에 너무 매달려있다. 그럼에도 저들은 그 표면적인 현상, 더 깊이 이해하자면 가상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그 힘을 스스로 구체화 시켜서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그 힘을 현실로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사실 문명의 초기에 가지는 당연한 오류이지만, 저들은 그 오류를 진리로 삼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며, 오류를 감추기 위해 새로운 오류를 창조해 내고 있다.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오류를 인정하게 되겠지만, 그 순간이 늦어질수록 더 많은 과거로 거슬러 가며 더 많은 오류를 정정해야만 한다. 만약 저들이 지금 당장에라도 관성 같은 힘만이라도 자신들의 믿음에서 제거해 버린다면, 순식간에 광속의 10배로도 가속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 중력까지 제거해버리면 나비의 날개짓 같은 힘만으로도 거대한 우주선을 태양계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지만, 저들은 외롭게 성장했기 때문에 스스로 큰 실패를 하기 전에는 결코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우주라는 평범한 공간에 그것을 방해하는 상대성이나 시간이라는 불필요한 개념을 넣었다. 백만 광년 사이의 두지 점을 1초 만에 통과하는데 왜 시간의 개념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왕복하게 된다면 무슨 시간적인 오류가 발생한다는 말인가? 스스로의 한계를 낮게 설정해 두고, 그를 중심으로 우주를 편협하게 살피게 되므로 저들은 도약의 발판을 접어버렸다. 저들은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를 넘지 못할 핑계거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현상과 관념과 힘을 빼고 나면 우주는 명쾌하게 해석된다. 우주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차원이나 크기나 시간이나, 확장성 등이 시야를 제한하고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질서는 보이는 그대로이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우주에는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고, 모든 현상에 대한 증명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원래부터 변하지 않는 간략한 몇 가지 법칙대로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복잡하게 하는 변수는 모든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 멋대로 추가한 인지력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각자의 후예들은 그들의 모든 예상을 보기좋게 뒤엎기 시작했다. 첫 탐사선이 태양계를 벗어나 100년 만에 센타우루스자리(Centaurus)를 지날 무렵이 되자, 오십년 후에 새롭게 출발한 다음 세대의 탐사선이 그것을 따라잡았고, 그 탐사선이 지구에서 10광년에 도달했을 때, 훨씬 후에 출발한 탐사선이 광속의 80%까지 추진하며 그를 따라잡아 임무를 이었고, 다시 백년이 지나기 전에 광속의 99.999%까지 가속한 7세대 탐사선이 성역의 경계에 이르러 알 나이르(Al Na'ir) 문명군의 십 광년 이내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은하 문명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들은 지금 불과 수백 년 우주를 여행하는 동안, 십억 년 전에 선각자들이 깨닫고 얻었던 만큼 우주의 진리에 대한 많은 것을 고스란히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 나이르를 비롯한 여러 문명체들은 과거 선각자들이 완성한 문명의 결과만을 전수 받았기에 모르고 있었지만, 선각자들은 지금의 저들과 마찬가지로 오류투성이인 상태에서 자신들의 고향을 나섰고, 우주를 가로지르는 동안 저들처럼 우주의 위험과 경이로움을 겪으며 지식을 축적하고, 정보를 편집하면서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지력과 시각을 얻었을 것이다.

선각자들의 온전해진 결과만을 전수받은 자신들에게 우주는 이미 안전하고 쉬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주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실패한 경험이 없는 그들이 직관하는 우주는 제한적인 시각으로만 인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저들과 같이 오류를 진리로 삼아 그에 대응하는 주관적인 우주를 바라볼 수 없었으므로, 더욱 좁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우주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인지를 가로막고 있었고, 선각자들은 그것에 의한 그들의 발전의 한계를 분명하게 절감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각자들은 십억 년 전, 그것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더 높은 문명으로의 진보를 포기한 채, 스스로를 희생하는 역진화를 선택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하여 다른 모든 문명들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알 나이르와 만나는 저들은 선각자의 후예가 아니라 바로 선각자 자신인 것이다. 이미 문명의 정점을 지나 십억 년을 보류했었던 '빛의 사람'으로 변모한 저들은 모든 문명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이며, 우주의 그 어떤 종족도 감히 경탄하고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선각자들이다.
 -끝-



세상에는 홀로 떨어진 존재는 있을 수 없다, 홀로 있다는 말 자체는 이미 다른 무언가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반드시 서로에게 어떤 관계로든 얽혀있고, 얽매고 있다. 우리는 자생한 문명이 아니며, 백억 년 동안 다른 누군가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이 아름답고 위험한 우주에서 더 지혜롭게 생존하는 법을 서로 교환해 오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간이 없어 초고를 그대로 올리다보니 매끄럽지 못했음을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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