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추는 영호충이 술을 건네는 것을 보자 받으려들지 않고  말했다. "영호충, 비록 좋은 술은 있으나, 좋은 술잔이 없군. 아깝군 아까워"
영호충은 말했다. "빈손으로 여행하는 중이니 이렇소. 조 선생께선 개의치 마시고 한 잔 드시구료."
조천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네. 자네는 주도(酒道)에 대해 이렇게 무심하니 틀림없이 주도의 삼매(三昧)를 모르시는 것 같군.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술잔을 따져야 하네. 어떤 술을 마실 때라도 그에 맞는 술잔을 사용해야 되는거야."


이렇게 말한 다음 조천주는 아홉 종류의 이름난 술을 거론하고 일일이 자세한 설명을 곁들입니다. 이 대화는 김용의 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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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술이라면 막연하게 좋지않는 선입견으로 백안시하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떠오르는 그 이미지가 다르기도 합니다. 술이라는 말에 소주나 맥주를 먼저 생각하기도 하고, 포도주나 칵테일 혹은 발렌타인이니 조니워커블랙이니 하는 양주를 먼저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와인이나 칵테일에 대해서는 왠지 고상하고 품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주나 청주 탁주에 대해서는 니나노판이라는 은근한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소 낮선 이름의 두견주(杜鵑酒)니 문배주라는 말에는 선비가 시(時)와 함께 풍류를 읊을때 마시는 술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술은 역사와 종류와 장소와 전통을 불문하고 술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술도 한잔 마시면 한잔 만큼 취하고, 두잔마시면 두잔 만큼 취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줍니다. 약이 되는 술이란 없으며 술은 마시는 만큼 얻게되는 취기를 위해서 마시는 것입니다. 그 적당한 취기에 품격이나 풍류나 고상함을 더하기 위해 향과 맛과 색을 가미하기도 하고 오래 묵히고 걸르고 증류하며, 원래의 목적인 취기가 끝나갈 무렵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독기를 빼고 희석하고 좋은 약재를 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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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없었다면 이백의 가슴에는 '만고(萬古)의 우수'가 없었을 것이고, 네로는 말도 않되는 시상으로 로마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한결 메마르고 재미없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왕 마시는 술이라면 역사적 실수는 아니라해도 마시면 "DOG"라는 오명은 없어야 할 것이며, "저 사람은 두사람이야, 마셨을때와 깼을때 전혀 달라" 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술은 적당하게 긴장을 풀어주고, 두려움을 감소시키고, 용기(때로는 만용)을 주며, 경직된 자리를 부드럽게 해줄 수 있으며, 떨림을 풀어주고, 잊었던 눈물을 찾아주고,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전제는 알맞음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마시는 술이라면 조금 더 을 높여보는게 어떨까요? 그러나 그 격이라는게 술에 맞는 격이어야 합니다. 예를들어 동동주는 나무탁자에 지기들과 둘러앉아 뚝배기에 떠서 파전과 먹어야 제격인데, 이쁜 유리잔에 담아 과일안주에 한모금씩 음미한다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격이 아닌것은 분명합니다. 술은 그 술의 맛을 그 술이 내는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어야 격에 맞는 것입니다. 위에서 잠깐 실었던 영호충과 조천추의 대화를 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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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汾酒)를 마실 때는 응당히 옥배(玉杯)를 사용해야 하네. 당나라 때의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  옥완성래호박광(玉碗盛來琥珀光 ; 옥그릇으로 술을 담으니 행기가 그윽하다)  이  싯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옥으로 만든 그릇과 옥으로 만든  술잔은 술맛을 더 해주는 법이네"

조천추는 한 단지의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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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지에 들어 있는 술은 관외백주(關外白酒)인데 술맛은 좋으나 단지 한가지, 향기가 부족하다네. 그래서 이 술을 마실 때  제일 좋은 것은 서각배(犀角杯)에 담아 먹어야 한다네. 그러면 그 맛은 무엇하고도 비교할 수 없지. 옥으로 만든 술잔은 술의  색을 아름답게 해주고 서각배 즉 코불소의 뿔로 만든 술잔은  향기를 첨가시켜 준다네. 옛사람의 말은 틀림이없지."

영호충은 낙양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 천하의 미주에 대한 내력이나 냄새, 술 담그는 이치, 저장할 때의 비법을  이미 십중팔구는 알았다. 그러나 술잔에 대한 것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때 조천추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으니 막힌 구멍이 탁  트이는  듯 후련했다.조천추가 또 말했다.

"포도주는 당연히 야광배(夜光杯)에 마셔야  그만이라네. 옛사람의 시에 이렇게 되어 있거든. 포도미주는 야광배가 제격이라, 그 술을 먹고 싶어 비파를 타며 말을  재촉하네(葡萄美酒夜杯欲飮琵琶馬上催). 그리고 알아야 될 것은 포도주는 요염한  색깔을 내니 우리같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마신다면 호기가  부족하게 된다네. 포도주를 야광배에 담으면 술의  색깔은  새빨간 피와 같아지기에 술을 마시는 것은 피를 마시는 것과 같은것이지. 악무목(岳武穆)이 지은 사(詞)에서는 대장부는 뜻을  세워  배가 고플 때는 오랑캐의 살을 뜯어 밥으로 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때는 흉노족의 피를 가지고 환담하네(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奴血). 이 어찌 장엄하지 않은가?"

조천추는 한 단지의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고량미주(高梁美酒)는 정말로 최고 오랜 술 중의  하나이지요.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의적(儀狄)이 만든 술을 우  임금이 마시고 기뻐했다는 술이 바로 이 고량주라네. 이 고량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청동주작(靑銅酒爵)을  써야만 비로서 옛맛이 나는 법이라네. 그리고 쌀로 빚은 미주(米酒)는 그 맛은 비록 좋지만 너무 달기에 엷게 걸러서 큰 그릇으로 담아 먹으면 호탕해지는 것이지"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배운 것이 너무 없어 술이나 술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정말 그 학문은 깊고도 넓군요." 조천추는 백초미주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는 술단지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 백초미주는 수백 가지의 약초를 채집하여 술을  담갔으므로 술의 향기가 맑아 봄 나들이를 가는 듯 하기에 마시지 않아도 취한 느낌을 준다네. 이 백초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고등배(古藤杯)에 부어 마셔야 하지. 백년 묵은 등나무로 조각해서  만든 술잔은 이 백초를 담아먹으면 그 향기가 너무나 그윽하지."

영호충은 말했다.
"백년 묵은 등나무는 무척 구하기가 힘이 들지요?" 조천추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군. 백년 묵은 등나무보다는 백년 묵은 술을 구하기가 더 어렵지. 생각해  보게. 백년 묵은 등나무는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어도 백년 묵은 미주는 모든 사람이 마시고 싶어하고 마신 후엔 없어져 버리지. 그러나 하나의 고등배는 천잔 만잔 마신다 해도 그  형태는 망가지지도 않고 여전히 내려오는 법이지."

"이 소흥장원홍을 마실 때는 반드시 고자배(古瓷杯)에 따라  마셔야 하지. 제일 좋은 것은 북송 때 만들어진 술잔이고, 남송 때 만들어진 자기술잔은 그래도 쓸 만하나 북송 때 만들어진 자기술잔보다는 못하지. 원나라 때 만들어진 자기술잔은  저속하기 이를데 없지."
 
"이 단지의 술은 이화주(梨花酒)인데 이화주를 마시려면 응당히 비취배(翡翠杯)에 따라 마셔야 한다네. 백낙천은 항주춘망(杭州春望)이라는 시에서 붉은 소매자락이 감잎처럼 나부 낄 때 문박의 푸른 깃발은 이화주의  향기를  더해주네(紅袖織綾枾葉, 靑旗沽酒?梨)라고 했지. 항주의 술집들은 이 이화주를 팔 때 비취색의 기를 문 밖에다  걸어놓고, 이 이화주를 팔고 있음을 나타냈다네. 이 이화주를  마실 때는 물론 비취잔이 제격이고 이 옥로주(玉露酒)는 응당히 유리배(琉?杯)에 따라 마셔야 하는거지. 옥로주에는 구슬 같은 기포가  생겨 이 투명한 유리배에 따라마시면 정말 보기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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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란 때로는 득이 되고 때로는 해가 됩니다. 없는 힘도 솟게하며, 감히 바라볼 수 없던 그녀에게 고백할 용기를 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장한 용기와 힘은 술을 기운을 빌지않아도 발휘되며, 술에 매이지 않아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밤. 고백을 바라고 감동을 바란다면 명심하세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입니다. 술로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그 한도를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 좋은 크리스마스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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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계인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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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24 22:1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렇군요~술잔에 관련된 글은 처음 읽어보는것 같습니다~^-^
    이렇게 독특한 소재는 어디서 아이디어가 샘솟으시는 것인지...
    저도 참 술을 좋아합니다 >.<
    학교다닐때 말술이라고 그러죠? 무지마셨습니다;;
    지금은 즐길정도로 마시는 술이 좋더라구요...
    • 2007.12.24 23:5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긍정님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
      설마 풍요속의 빈곤이신건 아니죠?

      아이디어랄게 있나요 그냥 포도주 생각하다가 생각나길래 ^^
      해피해피 크리스마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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