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동시에 기세가 몰려왔다. 가홀은 감히 가볍게 대하지 못하고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고는 작은 원을 그리듯 휘저었다.
‘쾅’
단순한 기세가 아니었다. 기세는 형태를 갖춘 칼날이 되어 물리력을 행사(行使)하였고, 가홀도 굳건한 마음을 기세로 몰아 방패로 형상화 하여 칼날을 막았다. 첫 번째 충돌로 칼날이 깨어지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두 번째 칼날이 찔러오고 있었다. 가홀은 손바닥을 펴서 다가오는 칼날에 맞서듯 하다가 날 끝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손을 몸 안쪽으로 당겼다가 반원을 그리며 밀었다. 그러자 칼날은 이어서 날아오는 세 번째 칼날로 날아가 부딪치며 힘이 상쇄해 서로 깨졌다.

룬이 손끝을 하늘을 가리키듯 세웠다. 손끝에는 순식간에 하얀 기류가 몰려 압축되며 작은 공이 만들어졌고, 그건 곧 회전하며 가늠하기 어려운 빠르기로 가홀에게 쏘아졌다. 그리고 그 공이 반도 날아가기 전에 룬의 손끝에는 즉시 새로운 기류가 맺히며 빛나는 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홀이 두 손바닥을 모았다가 한자가량 벌리자 연한 풀빛 기운이 손바닥 사이에 풀처럼 늘어나더니 다가온 공을 감아 삼켜버렸다. 룬은 손끝에 모았던 기운을 콕 찍듯 검지로 톡 건들었다. 그러자 공에 룬이 지닌 기운이 흘러들어가며 확 부풀어 올랐고, 다시 눈 깜빡할 사이에 원래 크기보다 작게 줄어들었다.

이번에는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으나 다가오는 공은 맹렬하게 뱅글뱅글 돌았고, 게다가 보이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공전하듯 어지러운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가홀이 미소 지으며 손가락 하나를 세우더니 쉽게 공을 찔러버렸다. 역시 공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공은 촛불이 꺼지듯 ‘팍’하고 사라져 버렸고, 공이 회전하던 궤도의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공기 중에 서린 김이 얼어붙으며 수만 개의 잔바늘이 되어 가홀을 덮쳤고, 가홀의 온몸은 빈틈없이 얼음가시로 뒤덮였다. 그러나 가홀이 한 호흡을 뱉자 일시에 얼음이 녹아 바로 증발하며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가홀이 발을 살짝 굴렀다. 발밑에서 ‘사푼~’ 소리가 들리자마자 룬이 디딘 땅이 움푹 패여 깊은 구덩이가 되었고, 주변 흙이 솟아 룬을 향해 쏟아졌다. 룬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가홀이 움직이는 중에 생각을 끝내고 대기에 뜻을 전했고, 그 지시에 따라 바람이 룬을 향해 몰아쳐 돌며 물을 만들어 뱉어냈다. 찰나의 짧디 짧은 시간 만에 태풍 같은 바람이 만든 물이 구덩이를 교묘하게 덮어 얼며 뚜껑이 되어 룬을 받쳤고, 더 많은 물이 흙더미와 함께 얼어 벽이 되었다. 그와 함께 룬의 눈높이 허공에는 반짝이는 손톱만한 공이 만들어져 있었다.

“좋은 수법이군.”
가홀이 감탄했다. 룬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고 느끼는 순간 공은 번개가 되어 가홀에게 떨어졌다. 공기 중의 산소와 수소를 강제로 결합해 물을 만들고, 그때 나온 전기를 축전(蓄電)해 공격하는 수법은 가홀이 보기에도 놀랄만한 발상이었다. 뜻으로 가까이 있는 환경을 움직일 수 있다지만 이렇게 구체적이고 알맞게 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홀은 공이 만들어질 때 이미 짐작하고 있던 터라 룬이 명하기도 전에 질긴 막을 만들어 두었었다. 가홀이 천둥의 기운을 땅으로 유도하자 디딘 땅의 풀과 흙이 시커멓게 탔다. 룬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으나 내심 놀랐다. 비록 크게 치지 않았으나 이다지도 쉽게 흘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가홀을 친 수법에는 이 행성 대기에서 끌어 모은 수분이나 압축한 산소와 수소, 전기 등 다양한 도구가 사용되었었다.

처음에 질소를 강제로 산소와 반응케 하여 오산화 이질소(N2O5)의 공으로 만들어 쏘아낸 공격을 유기물의 막으로 감싸 중화시켜 버린 것이나, 드라이아이스(dry ice)에 얼음 막을 씌운 바늘을 호흡으로 이끈 기운만으로 승화(昇華)시켜 버리는 등의 수법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우주에 명령을 내리는 건 조건을 정확히 알고, 정확한 때를 골라내는 눈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얼음을 금속으로 바꾸는 일은 안 되지만 금속을 액체로 만들 수는 있는 것이다.

압력이나 온도 등의 정확한 조건을 안다면 주변 환경을 이용하거나 금속을 직접 진동시켜 원하는 상태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유의 공방에는 능력보다 지식이 필요하고, 수없이 많은 실험이나 고찰로 가장 효율적으로 상황을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계 원소를 이용한 공방은 워낙 순식간에 이뤄지다보니 공격보다는 방어가 어려운 일일진대도 가홀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했고, 틈을 노려 반격까지 했다. 게다가 여유가 있는 것이 이런 일에 매우 익숙한 모양이다.

룬의 아지랑이가 줄어들더니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듯 사라졌다. 룬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안타깝군. 그대의 이룸이 크나 나는 팩시아를 거둬들여야 한다.”
가홀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하여 팩시아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가?”
가홀의 물음에 룬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모른다. 호밀엥이 여기에 팩시아가 있으니 거두라고 우리를 보냈을 뿐이다.”
그때 가홀은 떠오르는 바가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너희는 우리가 팩시아를 숨겼다고 여기는가?”
룬이 말없이 가홀을 살피다가 가벼운 고갯짓을 했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는 그리 여겼으나 너를 들여다보며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팩시아는 분명히 여기에 있다.”

확신하듯 말하는 룬을 보며 가홀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룬이 무심코 한 말에는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었다. 어떨 때는 ‘우리’라 하고 어떨 때는 ‘나’라고 했다. 여러 경우를 추측해볼 수 있었으나 호밀엥에서 여기로 보낸 건 여럿이지만 현재 이곳에 있는 건 룬 혼자라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결론이었다. 가홀이 다시 물었다.
“다른 이는 어디 있는가?”
룬이 멈칫하다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사실 그가 도착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주변을 훑어 탐색하며 동료를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 행성에는 자신 혼자였다. 수천 년을 여행하며 함께 고뇌했던 동료는 도착하기 바로 전 사라져서 그도 이상하게 여기던 차였다.

“간교하구나. 나는 혼자이다. 솔직히 함께 온 이들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가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 룬은 말하지 않으면 않았지 거짓을 말할 자가 아니었다. 가홀은 룬을 만나기 전부터 느꼈던 불안한 예감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구체적이지 않는 막연한 예감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

“너는 한과 닮았다. 한이 팩시아와 연관되었다고 여기는가?”
가홀의 말에 룬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가홀의 내면을 들여다 보았을 때 한의 정보가 흘러들어 왔었다. 물론 그건 가홀이 아는 주관적인 정보에 불과 했으나 한이 추구하는 바는 확실히 호밀엥과 닮았다. 그러나 한이 행했다는 일은 호밀엥과 대치되는 일이었다. 보편적으로 우주 문명은 문명이 아닌 생명체에 개입하지 않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개입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한은 이 행성 종족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진화를 주도하였고, 지향(志向)할 미래도 제시해 놓았다. 그럼에도 한은 호밀엥과 많은 부분에서 닮은꼴이다.

무엇보다도 한의 언어는 호밀엥과 비슷하다. 물론 호밀엥은 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할 필요도 없다. 소리는 전달하기에 제약이 많고, 표현 수단으로는 부족함이 많아 대기가 안정되었다던가, 다른 소통 수단을 갖추기 힘든 환경의 극히 일부 행성에서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호밀엥의 언어를 소리로 표현한다면 거의 한의 언어처럼 될 것이다. 이 행성의 사람이라는 존재가 내고 듣는 소리의 범위가 워낙 좁다보니 그마저도 제한적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홀이란 자가 처음 자신과 의사소통에 사용한 수단은 호밀엥의 그것이었다. 다만 호밀엥의 수단이 더 많은 포괄적인 정보를 전하는 것에 비해 가홀은 자신이 익숙하게 사용하던 언어에 다른 정보를 더했을 뿐이므로, 호밀엥에 비해 지나치게 간결했다. 가홀은 룬이 상념에 빠진 걸 보면서 흘러나오는 생각의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마음을 가다듬었고, 룬은 가홀의 물음으로 한꺼번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고심했다.

‘흠, 그렇게 놓고 보면 호밀엥과 한이 닮았다는 이 자의 말은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선조의 발자취가 이곳으로 이어졌고, 어떤 식으로든 한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호밀엥에서 선발대를 굳이 이 행성으로 정해 전송한 것도 어떤 흔적을 찾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를 보내는 데 꽤 무리한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에 시간 확장의 고통을 겪으며 동료 대다수를 잃었고, 그나마 남은 동료도 도착을 눈앞에 두고 사라져 버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룬은 문득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되돌아보며 정리해 나갔다. 무엇을 놓친 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느낌이 점차 강해졌다.


룬은 지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자신이 쳤던 의식의 방어막이 흩어져 생각의 조각이 흘러나가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직 이런 식의 신체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생긴 현상으로 마치 사람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나 호밀엥이나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해야 생각이 정리되는 모양이다. 룬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

‘시간 확장?’
가홀은 룬이 흘린 생각 조각을 읽으며 의아해 했다. 룬의 생각은 시간 확장의 가능성과 개연성으로 파고들다가 점차 시간 왜곡(歪曲)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가홀도 룬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하던 터라 말없이 그의 생각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가홀은 언뜻 언뜻 비치는 룬의 생각을 짜 맞춰 보았다. 룬은 호밀엥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시간 확장을 경험하였고, 그 효과로 체감시간이 길게 지연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왜곡되어 원래 가고자했던 시간과 다른 시간으로 흘러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개체별로 가진 사념(思念)의 잔상효과(殘像效果)로 동료들은 같은 장소, 다른 시간대로 흩어져 버린 듯하다.

룬은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리자 다른 부분에 흥미를 느껴 그걸 알아내고 증명하고자 했다. 그건 바로 지금이 언제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만 있다면 호밀엥에서 선발대를 송출(送出)할 때 사용한 ‘검은 구슬’의 힘과 거리, 실제 소모한 시간, 변환된 선발대의 체감시간, 그 외 자신이 얻은 심득의 양 등의 몇몇 변수를 대입해 계산하면 자신이 현재 속한 시간을 어느 정도 추측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행성을 무념(無念)의 그물로 훑어 봤을 때, 문명의 결과라 할 만한 어떤 장치도 발견하지 못했다. 덕분에 자신의 추측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울 듯 보였다.

룬이 가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한은 팩시아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내 생각을 엿들어서 알겠지만 팩시아는 여기 있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어느 시간대에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여기 있다.”
룬의 확신에 찬 말에 가홀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러자 룬이 가홀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가홀을 보며 말했다.

“사실 우리도 팩시아가 어떤 모양이고, 얼만한 크기인지, 또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호밀엥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고, 최근까지 너희 종족에게 개입한 증거가 있다. 무려 30만 년 전에 사라진 고대 호밀엥의 흔적 말이다.”
룬의 뜻밖의 말에도 가홀은 룬이 말하는 동안 이미 짐작했으므로 수긍하였으나 30만 년이라는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이 증거란 말이군. 그런데 30만 년 전이라니? 호밀엥은 지금도 존재하는 문명이 아닌가?”
룬이 한탄하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들은 정체된 문명의 벽을 넘어갔다.”

가홀은 룬이 말하며 함께 묻어나온 수많은 정보와 감정의 잔재를 고스란히 받으며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보편적으로 우주문명이 존속하는 기간이 십만 년에 불과하다니……. 문화와 기술, 정신이 극도로 발달한 문명은 성숙한 의식을 기반으로 향상성(向上性)을 추구하는데 어째서 존속기간이 짧은 것인가? 그건 향상성이 가진 함정에 있었다. 향상성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려는 성질을 일컫는 것으로 문명이 일정수준에 도달하면 더는 발전하기 어려운 상태, 즉 향상할 수 없는 상태인 정체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과학이나 철학, 사상 등 모든 면이 거의 완전해져 더 나아갈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 대부분은 ‘문명의 벽’이라고 부르는 정체기를 극복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넘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권태와 방탕에 빠져 자멸하게 된다. 이를 피하려고 강제로 감정을 제어하거나 새로운 목적의식을 심기도 하지만 수만 년이 넘는 수명을 보장받은 개체(個體)는 지루한 일상으로 삶에 대한 공황(恐慌)에 이르고, 개체의 상태는 집단으로 전염되어 결국 종족종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밀엥은 무려 삼십만 년 넘게 지속된 정체기를 잘 견디고 있다. 그건 바로 고대 호밀엥 때문이었다. 고대 호밀엥의 한 집단이 누구도 넘을 수 없다던 문명의 벽을 넘었다. 지역 은하를 탐사하던 한 집단이 문명의 벽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얻어 그 벽 너머로 갔다. 이른 바 ‘최종 진화’를 이룬 것이다. 그들은 그 열쇠에 대한 실마리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팩시아였다. 현 우주에 미련이 사라진다는 최종 진화 상태에서 실마리를 남겼다는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종족을 사랑한 것인지 대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팩시아를 찾으라는 정보를 호밀엥에 전송하고 사라졌다.

호밀엥은 지난 삼십만 년 동안 팩시아를 찾아 온 우주를 떠돌았고, 팩시아에 대한 희망 덕분에 자멸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호밀엥의 존속이유와 목표는 오로지 팩시아였다. 그런 호밀엥이 마침내 팩시아에 대한 단서를 얻어 이곳에 온 것이다. 우선 몇몇이 선발대로 보내졌고, 곧 대규모 탐사대가 끊임없이 따를 것이다.

룬의 감정이 가라앉고 다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가홀도 급히 감정을 추스르고는 룬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한 가지 더 묻겠다. ‘검은 구슬’이란 건 혹시 중력응축점(重力凝縮點)을 말하는 건가?”
룬이 흠칫하며 가홀을 보았다.
“정말 놀랍군. 이 행성에는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을 터인데도 안단 말인가?”
룬의 되물음은 긍정이었다. 가홀이 다시 말했다.
“가변형(可變形)인가?”
룬이 다시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홀은 호밀엥에 진정으로 감탄했다. 중력응집점이란 한이 전한 우주를 수치로 나타낸 정의에 자주 등장하는 상태와 현상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로 ‘블랙홀(black hole)’을 일컫는다. 그리고 가변형이란 일반적인 형태인 고정된 거대 블랙홀이 아니라 우주 초기 대폭발로 생성된 초소형 블랙홀이나 어떤 힘으로 인위적으로 생성한 제어 가능한 블랙홀을 말하는 것이다. 선대 단은 한의 가르침을 배우고 발전시키면서 가변형 블랙홀을 만들고, 제어해 이용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나마 증명했었다.

물론 가홀도 마찬가지로 공부하고, 검우에게도 가르쳤으나 그것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가변형 중력응축점은 그보다 확실하게 더 큰 힘과 동시에 힘의 작용에 관한 완전한 이해, 선명한 의지가 없으면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상태로 만들 수도 없고, 만들었다 해도 원하는 시간만큼 유지할 수 없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만들면 감당하기 어려워 스스로 상하기 쉽다. 그런데 호밀엥은 이미 그 힘을 이용해 룬을 이곳으로 보냈다.

룬 역시도 가홀의 예리한 관찰력과 주의력, 추리력, 집중력, 그리고 차분함에 놀라고 감탄했다. 이토록 황량한 행성에서 오직 직관과 냉철한 판단, 사고(思考)와 고찰(考察)만으로 우주를 이다지 깊이 살펴 짐작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지혜이다. 그것도 진화 정도가 정점(頂點) 근처에도 이르지 못한 원시두뇌를 가지고 말이다.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룬은 안타깝지만 가홀을 만나는 순간에 작정했던 대로 하기로 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곧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말했다.

“호밀엥이 오기까지 나는 팩시아를 찾아 얻고, 그걸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왔다. 작은 위협이라도 될 만한 요소는 전부 없애야 한다. 나는 문명협약(文明協約)을 어길지라도 그리 해야만 한다.”
잠시 주저하는 듯 했으나 이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온 자체가 이미 협약을 어긴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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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23 17:1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10년이 지나도 좋으니..

    연중만 말아주세요...

    (10년동안 계속 연재해주시면 더욱 좋구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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