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미국에 태어난 미국사람이 부럽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다. 나라가 잘 살지 못하는 시절에 태어나고 자랐음에도 나는 발전해가는 한국에 살고, 세계를 놀라게 하며 빠르게 성장해가는 한국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에 대해서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으면서도 뉴스에서 언뜻 들리는 한국기업들의 선전에 가슴이 뿌듯했고, 평소 스포츠에 문외한이면서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메달을 딸 때면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정치라면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잘 살고 있다고 고마워 할 줄도 알았고, 과학 분야에서 우리의 학자들이 뭔가를 최초로 발견했다거나 최고의 기술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며 즐거워했다.

며칠 전에 미국의 빌 클린턴 전대통령이 북한에 전용기를 타고 방문하여 두 여기자를 데리고 유유히 자국으로 돌아갔다. 북한의 핵무기 문제니 북미관계 개선이니 하는 말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자국민 보호에 유난을 떠는 미국이기에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자국민이 납치되었다면 그곳이 세계 어디라고 해도 어떤 수단을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구출하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대응과 그 의지는 이미 유명하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그 자부심을 지켜주는 미국이라는 조국을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는 어떤가? 130일째 뚜렷한 명분도 없이 억류된 현대아산의 유모씨와 800연안호 선원 4명은 과연 언제쯤 풀려날 수 있을까? 정치적인 대립이 끝나서 대북 정책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후에야 겨우 그들의 생환에 기대를 걸어 볼 수 있을 것인데, 현정부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가족들의 애통함에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그 애통함을 함께 느끼는 것이 오직 우리 국민들뿐임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지난 2003년 6월 15일 이라크 가나무역에서 근로자로 일하던 김선일씨는 납치되었다가 참수된 채 발견되었고, 얼마 전에는 예멘 북부 사다에서 한국인 엄모씨와 국제의료봉사단체 단원 및 가족 등 9명이 피랍된 지 3일 만에 전원 피살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었다. 2007년에는 단기선교와 봉사활동을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던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납치되었다가 곧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연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도 조국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정부는 이런 납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번번이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임기응변의 잘못이 아니라 자국민에 대한 보호 의지의 결여에서 비롯된 자국민보호 정책의 완전한 실패이다. 얼마전 장미정씨가 마약운반 혐의를 받고 프랑스의 외딴섬에 1년 6개월간 갇혀 있었을 때에도 현지 한국 대사관은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국민 보호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물론 유무죄의 여부는 프랑스 정부가 판단할 일이지만 그도 대한민국의 국민인 이상 정부는 마지막까지 그의 권리를 찾아서 보호해줄 의무가 있었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를 시행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국민은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여러 목적을 가지고 뻗어나가고 있다. 2008년 기준 해외출국자 수는 1300만 명에 육박했고, 해외에 체류하거나 거주하고 있는 동포의 수는 700여만 명에 달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유학이나 이민을 가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 민감해지고, 나라의 작은 성취가 더 마음에 와 닿고, 낮선 곳에서 들리는 나라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한국의 국민들은 나라에 대한 마음이 대단하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먼저 뭉치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항상 국민들이었다. 위정자의 실수와 정책의 실패로 가장 먼저 고통을 당하는 것도 국민들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들은 진심으로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고, 잘 사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나라가 잘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책이 실패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주길 바랄 뿐이다. 바로 다른 정치인들의 인정만 바랄 뿐이다.



국민이 위험한 나라에 가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위험지대에 왜갔냐며 귀찮아하는 것이 정치인이고, 그것을 표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 정치고, 일이 잘못 되었을 경우 국민의 감정을 무마하는 것이 정부가 할일인 모양이다.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무고시 출신이기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서비스를 받는 것에 익숙한 모양이다. 차라리 기업을 해서 직원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지 왜 하필 잘하지도, 잘할 용의도 없는 외교관이 되어서 국민의 위기를 외면하고 방조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800연안호와 유모씨의 문제는 다른 큰 문제들에 가려지고, 정부의 예상대로 그들의 가족들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국민은 정부에게 그만큼의 불신을 더하게 될 것이다. 자국민 보호에 신경 쓰지 않는 정부에게 소속감을 가질 국민은 아무도 없다. 나라의 위상은 달리 세우는 게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자국의 기업과 자국의 국민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대한민국을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만함은 정부의 안일한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내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더 많은 전문가들을 보내서 자국민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국은 오바마가 일관하던 현정부의 대북정책의 무게보다 두 명의 여기자 구출에 더 무게를 두었다. 한미관계 보다 자국민 보호가 우선한다고 판단하고 실행했다. 외교관계보다 미국 국적 사람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가 선명하게 전달된다. 우리 정부는 그래서 아쉽다. 정책의 무게가 자국민의 안전보다 우선한다. 머나먼 이국에서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을 맞이했던 자국민의 두려움과 원성을 듣고 있지 않다. 기억하지 않는다.  적어도 같은 일이 같은 단체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응징이라도 해주면 좋겠지만, 이미 지나간 이슈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여기자의 불법 행위에 대해 미국이 인정한 것처럼 우리 정부가 유감 발언을 한다면 5명의 문제를 풀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걸 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자국민이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자신의 자존심을 소신이라고 믿으며 고개 숙이는 법이 없다. 잘도 기러기처럼 떠돌다가도 정작 이런 중요한 문제에서는 요지부동이다.

이번 일로 한-미-북의 관계에서 우리가 소외될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억류된 대한민국의 국민 다섯 사람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부럽다. 아니 정확히 말해 미국이 아니라 그런 미국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미국인, 어떤 상황에서도 구출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미국인이 부럽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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