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친구들이나 또는 그 친구를 한다리 거쳐 알게된 사람들과 만나다보면 혈액형이 뭐냐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혈액형을 알아야 할 경우란 그리 흔치 않으므로 당황스러운 질문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타인의 혈액형을 묻는 것이 그리 낮설지 않으므로 "O형"이라고 답해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혼자서 생각하며, 지난 한 두시간 동안 내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을 자신의 기존 지식에 대입하며 나의 모든 것을 분석해 내려고 합니다. '으음~ 이사람은 친구를 잘 보살펴 주고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타입이구나. 또 유순하지만 목표를 가지면 대단한 추진력으로 밀어부치고 개성이 강하고 자기 주장도 강할거야. 그리고 생긴거랑 다르게 의외로 로맨틱하다 이말이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발끈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혈액형 이론'이라고 부르는 혈액형 유형별로 사람의 성격을 규정짓는 전설같은 이론은 일본에서 꽃을 피웠으나 그 일본에서 조차도 미신으로 치부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찬란하게 계승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책자나 잡지,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마치 이것이 사실이고 확고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정설이라도 되는 듯 열성적으로 전파되며 신도수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심리학자 오오무라 교수 조차도 일본인들의 이런 풍조에 대해 조그만 집단에 소속되어야 그 속에서 안심하는 일본의 민족성 때문에 그런 것을 믿는다고 했을 정도며, 사회적으로도 이런 엉터리 이론이니 외국인에게 이야기해서 망신당하지 말라고 할 정도인데, 여전히 일본을 비롯한 우리나라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1883년 영국의 F.골턴이 처음으로 창시한 우생학(優生學, eugenics)이라는 학문분야가 있는데, 우생학은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러 가지 조건과 인자 등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원래는 여러 유전적인 형질 중에 기질이 우수하고 건전한 소질을 가진 인구를 증가시키고, 열악한 유전적 소질을 지닌 인구의 증가를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의 모든 조건이나 인자를 연구하여 정신박약이나 혈우병 등을 가진 사람의 강제적 또는 임의적으로 단종시켜 우생의 인자만을 남기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단종법(斷種法)은 범죄자나 알코올중독 환자까지도 그 범위 내에 포함하고 있으며 강제법으로 시행하고 있는 주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치스 때의 독일은 이러한 우생학을 무기로 내세워 극단적으로 우생정책을 펼치며 극심한 인권유린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주로 유전소질의 개혁이나 개량보다도 백인이나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강제로 우생학에 근거해 끼워 맞추려고 했기 때문에 선결과 후연구 형식으로 이미 정해놓은 명제에 유리한 부분만 골라내어 맞춰가는 억지적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생학에 ABO식 혈액형 지식이 도입되며, 191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에밀 폰 둥게른(Emile von Dungern) 박사는 ‘혈액형의 인류학’이라는 논문에서 혈액형에 따른 인종 우열 이론을 통해 순수 게르만 민족의 피가 더럽혀지지 않는 A형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서양인의 경우 A형과 O형이 대부분이고 B형과 AB형은 10% 정도 밖에 없으므로 A형이 B형보다 우수하며, 자신들은 B형이 많거나 혈액형이 골고루 섞인 아시아나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당연히 혈액형의 우생학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 즈음 독일의 듄겔 등에 의해 이런 내용의 연구는 지속되었고, 당시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일본인 의사 하라 키마타(原 來復)가 1916년 혈액형과 성격을 연결시키려는 조사 논문을 발표하며 일본에도 이러한 혈액성 우생학의 내용이 흘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육군과 해군 병사들의 혈액형을 기록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정보가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의 조사를 통하여 혈액형과 성격간의 어떤 결정적 연관 관계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나치스나 일본이나...)
1927년 동경여자사범학교의 강사로 있던 후루카와 다케지(古川竹二)는 하라의 영향을 받아 친척, 동료, 학생 등 319명을 조사해 혈액형에 의한 기질 연구(血液型と氣質)라는 논문을 일본 심리학회지에 발표하였는데, 제목에서와 같이 자신도 황인종이었기에 차마 인종의 우열 기준으로 쓰지 못하고 혈액형에 따른 기질 분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혈액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나 큰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71년 이들의 영향을 받은 작가 노오미 마사히코(能見正比古)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에 의해 혈액형 인간학이 다시 크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그의 내용을 바탕으로 많은 종류의 혈액형과 기질에 관한 책들이 나오며 우리나라에도 다수의 일본책이 번역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혈액형을 기준으로 민족의 우열을 가리려는 목적의 내용이 후루카와에 의해 성격이나 기질로 변경되고 노오미(能見)에 의해서 잘 포장되어 우리의 구석구석까지 들어 온 것입니다.
혈액형에는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하여 1901년 개발된 A 또는 B항원의 유무에 따라 분류되는 ABO식 혈액형이 있으며, 1927년에 발견한 M 및 N항원의 유무에 따라 구분되는 MN식 혈액형이 있고, 1940년에 밝혀진 Rh0(D) 인자의 유무로 분류하는 Rh식 혈액형이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혈액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치스의 우생학이 한창이고 하라 키마타(原 來復)가 혈액형 기질을 발표할 무렵에는 ABO식 혈액형만이 알려져 있었기에 그러한 이론이 나왔던 것이고, 그에 영향을 받은 이후의 모든 혈액형별 기질에 관한 이론들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네 가지 혈액형을 기준으로 사람의 성격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버리는 놀라운 구분법을 당연한 듯이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혈액형으로 사람을 나누는 유행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외국인에게 혈액형을 물어 성격을 단정짓는다면 그것이 자칫 나치스의 우생학 잔재로 비춰질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영문도 모른 채, 이력서에 자신의 혈액형을 쓰거나, 본적(本籍)을 쓴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의 영향으로 혈액형을 통해 그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려는 것인데, 대부분의 회사는 이력서에 혈액형을 쓰는 이유 조차 몰랐을 수도 있지만, 혈액형만으로 사람의 첫인상을 단정짓는 것은 본적란에 쓰인 출신 지역만으로 그 사람의 기질을 단정짓는 것과 다를바 없으며, 인종만으로 우열을 가리는 차별과도 같을 것입니다.
가타카(Gattaca)도 아니고 한 사람의 기질과 성격과 사교성과 사회성, 애정관계까지 한 가지 요소만으로 모두 파악해 버리려는 불순한 의도의 미신같은 이론에 너무 빠져 버린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게 하며, 그 선입관에 맞춰진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1940년대 말의 심리학자인 포러(Bertram Forer)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각의 성격 테스트를 한 뒤,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신문 점성술 난의 내용 일부만을 고쳐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 테스트 결과가 자신의 성격과 맞는지 아닌지를 학생들이 평가하도록 하였습니다. 자신이 받은 테스트 결과가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보통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을 자신의 성격으로 묘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특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으로 믿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일수록 강해지는데, 이처럼 착각에 의해 주관적으로 끌어다 붙이거나 정당화하는 경향을 바넘효과(Barnum effect) 또는 포러효과라고 합니다.
억지로 자신의 성격을 혈액형에 끼워 맞추고 거기에 타인의 성격과 운명까지 그 틀에 밀어 넣으려는 이런 시도는 오늘의 운세를 철석같이 믿고 로또를 구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동창모임에 나가며 오늘에 운세가 좋으니 고스톱에서 돈을 따겠다는 아빠 말에 딸이 다른 친구들 모두가 같은 운세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오직 O형만 있는 페루 인디어이나 O형이 98%인 마야인이 모두 같은 기질, 같은 성격, 같은 운명, 같은 애정형을 가지고 있지 않듯, 모든 사람은 환경이나 경험 등에 의해 제각기 다른 기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부 학원에서 보여주는 혈액형별 특성개발이라는 짓거리를 보면 쓴웃음이 나옵니다. 유전소질의 개혁보다도 환경과 교육의 개선에 중점을 두어 인류를 개량해야 한다는 과학이 있는데, 이를 우경학(優境學 euthenics)이라고 합니다. 과학적 근거나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는 혈액형 인간학보다는 우경학에 몰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피씨방에서 잠시 들렀는데 분위기가 너무 산만해서 글 내용도 산만한 편입니다. 시간이 나면 다시 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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