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이야기인데, 그날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순간의 모든 기억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어 가끔 악몽을 꾸거나 비슷한 상황이 오면 두려움에 떨곤 합니다. 여전히 그날의 일이 사실인지 착각인지, 혹은 꿈에 불과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 소름끼치고 오싹한 느낌은 살아있는 한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에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가 생맥주 딱 한 잔을 마셨는데, 그날은 왠지 속이 불편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한 여름 오후의 후끈거리는 열기에 술기운이 더해지자 온 몸에 땀이 흐르며 답답한 느낌과 함께 속이 거북해 졌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는 4x번으로 보통 10~15분 배차이지만 주말의 시내 교통상황을 감안한다면 운이 나쁠 경우엔 30분을 기다려할 수도 있기에 적당히 가로수 그늘에 기대어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재래시장이 근처라서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장바구니나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고, 정류장 근처 슈퍼에서 나무 아래 내놓은 평상에도 몇 몇이 앉아 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는데 버스를 기다리던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왜 이리 안오는거야“ ”30분이 넘었는데 안오는거 보니 사고라도 났나 보네. 그냥 택시 탈까? “ 그 옆에 친구인 듯 보이는 다른 아주머니의 말에 몇 몇이 주섬주섬 장바구니를 챙겨 평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처럼 환승제도가 없었던 때라 그 노선을 타지 않으면 차비를 2번 내야했고, 아니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는데, 평소라면 집 근처에 가는 아무 노선이나 탔겠지만 그날은 속도 불편하고 알 수 없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 30분이 넘었지만 그대로 기다리고 서있었습니다. 하나 둘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새로 나타나 영문도 모른 채 오지않는 4x번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짜증스런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가 넘어섰는데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다보니 나는 오기를 넘어 화가 난 상태가 되었고, 다시 30여분이 지나면서 감정이 더 격해지기 시작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기에 속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들을 노려볼 뿐이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는 동안 갈등을 하다가 결국은 포기를 하고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띄엄띄엄 도로 위에 내려선 사람들이 앞쪽에서 택시를 잡기위해 손을 들고 있어 어쩔 수없이 어정쩡하게 기다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더 앞으로 가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먼저 택시를 잡으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기에 일단 아무 버스라도 오면 타고 적당히 내려 갈아타거나 걷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분 정도가 지나 저 멀리에서 신호가 바뀌며 몇 대의 버스가 출발했고, 그 중에서 집 방향으로 가는 노선인 5x번을 선택해서 타려다가 그 동안의 기다림이 아깝고 아쉬워서 행여나 하는 마음에 돌아보는데 눈에 익은 번호가 보였습니다.
xx동 4x oo동
급히 걸음을 옮겨 4x번이 다가오는 쪽으로 갔고, 버스는 정확히 내 앞에 멈춰서며 문이 열렸습니다. 사실 그 간의 기다림 때문에 화풀이로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아무소리 못한 채 계단을 쿵쿵거리며 거세게 올라가 토큰 하나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거친 걸음을 유지하며 걸어가 내리는 문 바로 뒷자리에 털썩 앉아 창밖을 노려보며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데,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스치며 술과 더위와 짜증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차갑게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건 분명한데 뭐가 이상한거지? 눈이 버스안과 밖을 빠르게 훑으며 비논리적인 부분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 두시간만에 나타난 첫 차인데 버스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2. 나와 같이 4x번을 기다리던 몇몇의 사람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타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떠오른 일이지만 당시 버스에는 에어컨이 없었는데도 모든 창문이 닫혀있었고 또 그럼에도 버스 안은 덥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서늘했었습니다.-
난 무의식적으로 내가 버스를 잘못 탄 건가하고 고개를 들어 앞에 붙은 번호를 확인했는데, 선명하게 찍혀있는 4x 라는 숫자와 맞은편 천정 모서리에 붙은 노선도를 보고는 안심이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 마음을 떨치듯 버스가 출발하려하자 창문을 열었는데 밖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의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이 들여왔습니다.
“4x번은 안오는갑다. 다른거 타자”
무심코 흘려들었다가 그 의미를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어?” 하며 다시 한번 번호를 확인하자 분명 4x가 맞았고, 스스로 ‘술이 조금 올랐는가’보다며 애써 외면했지만 심하게 뛰기 시작한 박동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버스는 다음 신호에서 좌회전했는데 거기서 부터는 4x번의 단독노선이므로 좌회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히 잘못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가까워졌고 대충 보기에도 십여 명이 서있었는데, 그 정류장은 4x번만이 정차하므로 당연히 4x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분명했습니다. 끼이익 하는 귀에 거슬리는 브레이크 소리가 끝나자 버스는 멈춰 섰고 취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창 너머로 웅성 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버스가 출발했고 잠시 후에 우회전하면 다음 정류장이 바로 코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창문을 닫았지만 두런두런 부산특유의 사투리로 짜증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여왔습니다. 불안감을 넘어 등골이 오싹하며 머리가 쭈삣 서는 느낌 속에서도 나는 눈을 뜨지 못한 채 기다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꼬고는 한쪽 발을 까딱거리며 이제 세 코스만 더 가서 내리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박자를 세자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두 정류장 전 ‘oo 여고’ 앞에 버스가 멈추자 눈을 떴고 보충수업을 마친 여고생들이 잔뜩 모인 채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이쪽을 바라보던 예쁘장한 여고생의 눈빛과 마주쳤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빛을 피해 눈길을 옆으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보통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 마련인데 그 여고생이 아직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흥미와 함께 오기가 생겨 나도 시선을 그 여고생과 마주친 채 노려보았는데 잠시 후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다! ‘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여고생은 나와 정확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지만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먼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니 4x번 버스 전체가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지 않는 듯 더 멀리 길 건너편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러오는 한 여고생의 앙칼지고도 껄렁한 목소리..
“아이 쓰x 더워죽겠는데 버스 x나게 안 오네”
아무런 생각도 이어지질 않고 터질 듯 쿵쾅거리는 가슴, 손발이 떨려왔고 나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숨소리..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일어서서 벨을 눌렀습니다. 한 정류장 전이지만 더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았고 무조건 내려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자 약간의 안심이 되었지만 손바닥은 땀이 고여 축축했고, 후들거리는 다리.. 거슬리는 브레이크 소리가 끝나며 뒷문이 열리자, 문 옆에 붙은 기다란 손잡이를 잡고 허리를 숙이며 뛰어 내리듯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으로 머리가 나가는 순간 확 끼쳐오는 차가운 느낌과 까맣게 변하는 시야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확 뺐습니다.
제과점, 담뱃가게 두런거리는 말소리들.. 환하게 불이 켜진 채 돌아가는 미용실 간판.
다시 머리를 버스 밖으로 내미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소리도 없고 불빛도 없고 거리도 가게들도 모두 사라지고, 냉장고 속에 머리는 박은 듯 서늘한 공기..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너무나 까만 공간뿐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공간이라기보다 그냥 백지 같았습니다. 2차원의 까만 종이위에 나 자신도 2차원적 존재로 내려서는 느낌.. 그 기묘함이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 놀라선지 계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아저씨 잘못 눌렀어요. 다음에 내릴게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아주 큰소리로 외쳤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대상인 버스 기사를 향한 구원을 표현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익숙한 사투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 그라입시다”
이제 스스로에게 이해시킬 수 없는 비현실성 때문에 창 너머 보이는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나 스쳐 지나는 익숙한 간판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습니다. ‘문이 열리면 단번에 뛰어 내린다.’ 버스의 두 계단 중, 중간의 계단에서 밖으로 뛰어내린다고 해도 크게 다칠 리 없기에 그런 생각을 굳히자 어느 정도는 진정이 되었고, 다시 한번 차분하게 어떻게 뛰어내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침내 버스가 정차하고 문이 열렸습니다. 조금 전의 그 풍경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지만 머리와 허리를 숙이며 두발을 민첩하게 움직여 한 계단을 밟으며 넓은 보폭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경계점(Boundary point) 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해준 적이 있는데 몇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괴담으로 떠돌다가 필자의 귀에까지 다시 흘러들어 오기도 했습니다만 자세한 내막과 전체를 공개하기는 처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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