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천년 후까지 인류의 문명이 멸망하지 않고 잘 발전해 나간다면, 우리 후손은 근처 수십 광년 별 주변에 식민행성을 건설한 우주시대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인류만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문명을 이어갈 수도 있으나, 아마도 그 때 즘이면 우주에 산재해 있는 다른 문명들과의 필연적인 만남을 이루며, 서로의 문화와 문명에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에는 항상 충격과 그에 따른 감정적인 표현이 따르게 되므로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겠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최선의 길을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몇 번 겪으며 인류는 우주시대에 걸맞은 사상을 배우며 성장하게 됩니다. 이 때 여러 문명은 자신과 같지 않은 다른 것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연합하여 거대한 문명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우주에서 매우 흔한 일이고, 서로 연합하지 못해 공멸한 경우 또한 매우 흔한 일입니다. 다행하게도 인류가 다른 문명과의 화합에 성공한다면, 은하에서의 영역을 넓히며 우주시대를 풍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합한 문명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며 그 연합한 문명권에 대한 명칭을 부여하게 됩니다. 물론 그 이름은 짐작대로 ‘은하연방(銀河聯邦)’입니다. 은하의 일곱 번째 팔의 열두 번 째 섹터의 연합이나 은하의 남동지역연합도 아닌 은하연방입니다.

우주에 나아간 많은 문명들이 은하연합이나 은하연방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해 스스로 지위를 격상시키지만, 그것은 고립되어 있던 작은 섬이 주변 몇 개 섬과 연합하여 그 모임을 UN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우리 은하에는 같은 시대에 찬란하게 꽃핀 백여 개의 문명이 공존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각각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최소 수백 광년에서 이천 광년이 넘는 먼별까지 영향력을 확장할 정도였고, 20만년 이상 발전을 거듭하며 진보했던 문명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서로의 존재를 확률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경우에는 서로의 존재를 희미하게 포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천광년이 넘는 거리의 문명권끼리 만난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므로, 직접적인 문명권들의 만남이나 충돌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발전한 문명권을 이룬 그들도 지름 10만 광년의 은하에 그렇게 많은 거대 문명들이 동시에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우주는 넓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백여 개의 문명권 대부분이 스스로 은하의 대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천 개의 서로 다른 우주 문명이 연합해 만들었던 아시스 문명권뿐만 아니라 불과 이십 사개의 우주 종족들이 연합한 연방조차도 그 이름을 스스로 은하연합이라고 칭했습니다.



문명이 극에 이르면 항상 거대한 벽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진보의 정지이며, 학문의 한계이고, 이념의 정체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단 한 치의 발전도 할 수 없는 벽입니다. 이때가 되면 문명은 이제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었고, 과학과 철학이 완결하므로 더 이상 배울 것도 알아낼 것도 없으므로 한계에 이른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이제 우주는 몇 개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뚜렷한 물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태되어 갑니다. 찬란했던 십만 개의 우주 문명(Universal Civilization) 중 99%가 그렇게 권태에 찌든 나태함으로 도태되다가 멸절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우주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쉼 없이 들어왔다 나가는 파도가 일렁이는 해변 모레사장에 그린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1억년도 되기 전에 사라진 문명의 흔적은 그야말로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20만년 동안 삼천 개의 문명이 연합하고 발전시켰던 아시스 문명도 문명의 벽에 부딪친 후, 최후의 생존자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기까지는 구천년도 걸리지 않았고, 일억 년은 고사하고 오천만년도 되기 전에 그들의 흔적은 주춧돌 하나 남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벽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탐색하여 그 벽 너머에 다른 세상, 더 진보한 이념을 가진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마침내 그 벽을 깨고 진정한 다음 단계의 우주 문명(the Civilization of the Universe)에 도달한 문명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1%에 지나지 않으나, 지난 우주의 긴 역사에 비추어 보자면 우리 은하에서만도 다음 단계의 문명에 진입한 문명은 수천 개가 넘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보통 은하 전체를 하나의 지역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게 되고, 아울러 시공간의 불일치를 감당해낼 수 있는 철학을 거의 완성한 상태입니다.

이때, 그들은 원한다면 그 순간 은하에 존재하는 수만 개의 이전 단계 문명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며 진정한 은하연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전 단계 문명을 일시에 복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럼에도 이 단계에 오른 어느 문명도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은하에는 드러난 문명보다 자신과 같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드러나지 않는 문명이 더 많고, 그 문명들은 이전 단계에서 보다 더 활발하게 우주를 연구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새로운 벽을 만나고, -확률이 아주 낮지만-그 벽을 깨면 또 다른 단계의 문명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주는 문명에게 항상 껍질을 깨며 더 큰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배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충실히 현재를 보내며 미래를 준비한다면 500만년 후에
별을 움직이며, 은하 전역을 우리의 감각 안에 수용할 수 있는 III단계 문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생명을 특별나게 여기지 않는 가혹한 우주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기술력과 그 기술력을 제어할 만큼의 도덕과 균형 잡힌 수학이 깃든 철학이 함께 진보해야 하겠지만, 우리 인류는 잘 해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명이란 것은 아무리 발전을 해도,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이미 존재하는 우리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음 단계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환경과 한계의 극복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문명은 단계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차원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그 격이 다릅니다. 문명의 벽을 넘는 다는 것은 하나의 단계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이전 문명, 그 문명을 위한 우주란 그저 그 차원에 속한 작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알의 껍데기를 깨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부화(孵化)가 아니기에 그것은 벽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는 갑옷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세계가 좁다고 느낄 만큼 충분히 성장해야 합니다.

우주는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이미 은하를 넘어 은하를 하나의 작은 지역으로 볼 만큼 거대한 시각을 가진 상태에 도달한 문명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아니 여럿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4백억 광년 떨어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걸친 그들은 우주연합, 또는 우주연방일까요? 아닙니다. 이젠 시공간이라는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그들은 우주의 태초와 최후를 같은 선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전지적 입장이 되어 있을 것이지만, 여전히 끝없는 우주의 작은 한 귀퉁이만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적당한 단계의 문명에게 우주는 한없이 크고 넓게 보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우주, 압도적 크기의 우주를 발견한 그들에게 우리 우주는 너무나 좁고, 얕을 뿐입니다. 그런데 감히 우주연방(宇宙聯邦)이라니요.


- 모든 사진 출처 : Pink Sherbet Photography
- 이번 포스트 역시 작가의 사고유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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