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文明)을 구분할 때 보통 두 가지로 문명을 나눈다. 다른 문명과 접촉한 문명과 문명을 접촉한 적이 없는 문명이다. 후자라면 아직까지 자신들이 우주의 전부이거나 유일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다른 문명과 만나는 순간 스스로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 주관으로 우주를 판단했는지 깨닫고 새삼스런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은하에 적어도 이천 육만 삼천 구십 종의 문명이 공간만 다를 뿐,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오차율 0.93% 정도에서 예측하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시시각각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은하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을 헤아릴 수 없고, 매 순간마다 시작하거나 종말을 맞이하는 문명의 수를 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게다가 은하 헤일로(Galactic halo)나 그 안팎에 산재한 구상성단(globular cluster)에도 상대적으로 드물지만 다양한 생명체가 나타나고, 내부 은하 못잖은 0.072% 수치로 문명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 은하에 존재하는 문명의 수는 은하의 범위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후에 문명의 기준을 마련하고, 지난 칠십 삼만 오천 이십 이년 동안 기록된 은하 환경과 현존문명의 수에 대한 변수를 계산하여 구할 수밖에 없으므로, 약간의 오차율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정기적으로-칠천 육백 삼십년 마다- 표본조사를 실시한다. 그것은 전수조사(全數調査 census)를 할 수 없으므로, 층화추출법(stratified sampling method)PSRS(Parallel Sorting by Regular Sampling 고른 표본 추출을 통한 병렬 정렬) 알고리즘을 도입하여 추출한 이천 육 개의 문명과 준문명(準文明)을 대상으로 하며, 그 결과를 토대로 우리 은하의 시대별 문명지수를 산출하고, 문명의 척도나 변수 등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으며, 문명지수의 변화 요소를 고찰하여 기록한다. 그래서 우리는 표본을 조사하는 데 매우 신중하면서도 섬세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관찰하고, 체험하고, 실험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표본 문명의 생활과 문화에 동화되어 그 문명을 기준으로 수 세대를 살기도 하고, 극적인 상황에서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극단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표본 중의 하나인 이들은 은하의 오지(奧地)에서 다른 문명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험을 위해 고의로 모습을 드러냈던 조사단의 탐사선에 미사일을 발사하여 위협했을 정도로 원시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 탐사선은 은하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생명체가 감지할 수 있는 다감각용 발산재(發散材)가 처리되어 있다. 모든 종류 생명체의 감각과 기술력에 감지되지 않는 기술도 어렵지만, 우주에 요동치는 에너지 물결 속에서도 선명하게 원하는 형태대로 감지되게 하는 기술은 더 어렵다. 낮선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비록 현재 기준에서 문명으로 인정받기에 미흡한 준문명이라지만, 이들은 지나치게 적대적이었다. 그런 식의 반응이 약간 의외였으나, 이들의 대처는 나름대로의 솔직한 표현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을 처음 관찰하던 우리는 이들의 지나치게 간결한 언어와 지나치게 감정적인 문화에 깜짝 놀랐었다. 예를 들자면 이들은 자신의 별을 둥글다고 하는데, 이미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에서 자신의 별을 관찰하여 둥근 것이 아니라 갠케일로스형(形) 구체(球體)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둥글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에서 둥글다는 말은 완전한 구형(球形)을 지칭하는 것이로, 완전 구형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그 둥근 정도를 193가지로 세분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그 구형이 얼마나 타원에 치우쳤는지를 알 수 있다. 갠케일로스형이라는 단어에는 타원형에 대해서만 사용되어 가로가 더 넓음을 의미하는 접두사(接頭辭)인 ‘갠’이 붙어 있고, ‘케일’은 그 타원의 이심률(離心率)이 10% 이하로 완만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 뒤에 특정 범위를 표시하는 ‘로스’가 붙었으므로 그것이 1/100에서 2/100 사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결국 타원의 이심률은 0에서 1 사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갠케일로스형’ 구체라는 단어만으로 우리는 이 행성의 실제 이심률인  0.016710219과 비슷한 타원체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색상을 나타내는 단어로 보통의 영역에서 구분 할 수 있는 21만 5천 8가지와 보색 등의 효과에 의해 강조되는 7천 2백 2가지를 사용한다. 그래서 누가 카로이카루색(色)이라는 말을 하면, 그것이 철이 2750℃에 이르렀을 때 끓으면서 나타나는 색과 오후 3시 무렵의 태양빛의 중간이 되는 색상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적으로 숫자를 빌지 않으면 백가지 색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들의 언어에는 감정의 개입이 심해서 같은 이로쿠색(色)을 놓고도, ‘붉다’, ‘빨갛다’, ‘벌겋다’, ‘시뻘겋다’, 등으로 표현하므로, 말만 듣고 그 색을 객관적으로 떠올리기는 99.0954% 불가능하다.



실제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일상어로 사용하는 구십사만 칠천 단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이천 개도 되지 않는 단어만으로도 큰 불편을 겪지 않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이들의 생활이 경쟁이나 생존, 사랑과 미움, 격정과 흥분 등, 감정을 따르는 단순함의 반복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제한적인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리라. 감정은 경쟁과 진화(발달)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여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자리 잡아 문명을 촉발하지만, 이미 생존이 보장된 문명에서 감정은 권태나 분노라는 자멸의 칼날이 되기도 한다. 진보에는 오직 냉철한 계산과 결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현 단계의 이전 수준에서 멸망을 했어야 함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언어와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문명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시의 산물인 감정을 그에 맞게 제어할 수 있어야한다. 감정이 개입된 것은 원시적인 문명의 초기 단계만으로 충분하다. 감정이 때로는 문명의 촉매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재 때에 제거하지 못하면 진보는 발목을 잡힌다. 실제로 우주에서는 이들과 비슷한 0.7 단계의 문명이-1.0 단계부터 문명이므로 사실 0.7단계는 문명이라 할 수 없다- 적절한 감정제어의 실패로 소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껏 자멸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고 해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들 역시 1.0 단계로 들어서지 못한 채 소멸할 것이다.

1.03% 정도의 예외로 감정을 고스란히 지닌 채 3단계 문명까지 발전한 경우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문명은 1.0 단계의 진입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성공적으로 감정을 제어했던 경험이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멸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서야 감정이 문명 유지와 발전의 가장 큰 해악임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약물이나 전자적 장치를 통해 감정 제어를 시도하거나, 외과적 수술이나 유전자의 조작을 통해 감정을 제거하는 시도를 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며 어렵게 1.0 단계의 문명에 도달하였다. 이 후에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통합방안이 개발되어 ‘문명’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성적인 존재로 탈바꿈하였다.

우리도 칠십 삼만 구천 삼백년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있다.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감정제어에 성공한 문명이 드물 정도로 우리는 매우 훌륭하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그것에는 우리 종족만의 독특한 진화패턴과 그에 따른 특이한 신체 구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두 개의 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해부학적인 구분이 아니라 완전히 분리된 사회적 기능에 의해 구분한 것이다. 하나의 뇌는 일상적인 인지를 하여 생존이나 생활, 활동, 행동을 제어하고 있고, 다른 뇌는 잠재적인 활동으로 객체의 상태를 평가하여 보고하며, 의논한다. 칠십 삼만 구천 삼백년 전 우리 선조들은 유전자의 조작으로 후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심리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자아를 가지도록 설계했던 것이다.



하나의 뇌가 감정이 배제된 객체의 주체인 ‘나’가 되어 활동한다면, 다른 뇌는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모든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더 발전시킨 ‘이성’이 되어 숨어 있다. 원래 선조들은 나중에 제거할 목적으로 심리적으로 이성의 뇌를 분리하였으나, 모든 감정이 제거된 생명은 수학적 판단과 맹목적 행동만을 하는 ‘생체기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세컨드 뇌를 숨은 이성으로 남겨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항상 어떤 심리적인 흔들림 없이 모든 일에 93.441% 집중할 수 있으면서도, 우주를 바라보며 순수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어쨌든 문명이 되려면 혼란한 원시 상태의 감정을 정제할 수 있는 감정제어 기술이 98.97% 필요하다.

혼란스러운 객체들의 감정이 제어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들의 정치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의 속한 집합(지역, 연고, 국가 등)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치루는 이들에게 어찌 종족 전체의 미래와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정치는 특정 개인을 대표로 내세울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의 세컨드 뇌는 유기적인 연결 고리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서로 최선을 도모하는 의논과 결정을 할 수 있고, 그를 실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곳 시간을 기준으로 이백 사십 구년 칠십육일 동안 이들과 함께하며 탐색하고, 체험했다. 조사 방식과 기간은 전적으로 탐사대에게 일임되므로, 우리는 탄력적인 운행으로 더 자주, 더 깊이 이들의 생활과 문화를 체험해 왔다. 초기에는 원격제어로 몇몇의 집단을 조종해서 한 나라의 독립을 이끌며 이들 정치와 역사에 깊숙이 관여하며 연구하기도 했고, 수시로 이들의 일원으로 폴리모프(polymorph)하여 새로운 철학이나 학문, 기술을 전수한 후, 그에 대한 객체와 집단의 반응과 대응, 문화적인 변화 등을 정밀하게 계측하여 그것이 가져온 문명 촉발 지수를 계산하고 설정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들의 행복지수가 어쩌면 우리보다 높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 이들의 조상은 땅 끝에 서서 그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했고, 지금 이들은 시야로 볼 수 있는 거리만큼을 놓고 우주의 끝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순박한 종족인가? 이들의 표현대로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이 있음을 알게 되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자신이 얼마나 좁은 곳에 사는지를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우물 밖을 알지 못하는 한 이곳이 세상의 전부이며,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가장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꽤 '정(情)'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만 한다. 규칙에 따라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실행해야할 때다. 조사 과정에서 오염된 이 문명을 자연계에 그대로 방치할 경우, 가진 철학에 비해 지나치게 위험한 기술은 장기적으로 우주의 질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우리는 이들 아니 이 별을 지금 상태 그대로  표본 처리(specimen)하거나 철저히 고립시켜야만 한다.



우리의 세컨드 뇌는 오랜 논의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항로도 개척되지 않은 머나먼 오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저 멀리 반짝이는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꽤 깊은 정이 들었나 보다. 비록 저들은 고립되어 영원히 다른 문명과 만날 수 없겠지만,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저들을 더 행복하게 할지도 모른다. 우주에는 오직 자신뿐이라는 외로움이 있겠지만, 우물 안이라는 것을 모르는 한 여전히 행복할 것이다.

-그림출처 : http://exper.3drecursions.com
-아마존의 눈물을 보면서 구상했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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