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 명확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우주는 어느 한 순간 하나의 특이점을 거치며 막강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쏟아 내었고, 집약된 유한의 장소는 순식간에 최소한의 법칙만 존재하는 무한의 공간인 카오스가 되었다. 원시 에너지들과 봉인되지 아니한 힘들은 아직 결정되지 못한 우주를 선점하기 위한 끊임없는 다툼을 모든 시간 속, 모든 장소에서 벌렸으며, 그로 인해 야기된 지독한 혼란은 더 미시적인 세계까지 확대되면서 에너지들 사이의 간격을 벌리며 갑자기 우주를 확장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의 혼돈은 어느 새 우주의 방향을 팽창이라는 쪽으로 결정짓고 있었고, 그 결정은 우주를 구성하는 에너지에 의한 것이든, 그 구성체들의 변화에 의한 결과든, 하나의 의지로 화(化)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가이아( Γαι^α : Gaia)의 비밀과 맞물려 있다. 즉 가이아가 태초 이전에 존재하여 혼돈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혼돈 그 자체가 가이아가 된 것인가, 또는 혼돈이 질서를 잡으며 발생한 최초의 의지가 의식체가 된 것이 가이아인가 하는 논란인데, 가이아는 이미 백억 년 이상 침묵을 지키며 우주 질서(cosmos)의 역할만 하고 있기에 그 논란은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영원한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카오스라는 혼돈 자체를 하나의 의식체로 보고, 카오스가 가이아를 낳았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보기에는 전우주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카오스의 수명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카오스가 변형한 형태가 가이아이며, 카오스는 혼돈 속에서 에로스(Eros)를 배출하므로 질서라고 할 수 있는 가이아가 될 수 있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봤을 때, 에로스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낳는 원동력이므로 또 다른 형태의 질서라고 볼 수도 있다. 가이아와 에로스는 하나에서 출발한 두 가지의 질서로 만약 두 질서가 합쳐지면 다시 우주는 혼돈이라는 카오스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리라.



어쨌든 에로스는 태초 이후에 숨은 질서로만 존재하다가 가이아가 숨은 질서로 돌아간 후에야 직접적으로 우주에 관여하게 되었지만, 이전의 젊고 활기찬 우주의 주인은 가이아였다. 가이아는 현재의 시간 인지력을 기준으로 하자면, 혼돈이 시작점에서 10의 -44승 초 시점에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에 하나뿐인 거대한 미증유(未曾有)를 힘을 쉽게 다루기 위해, 그것을 약력과 전자기력 등의 여러 힘으로 분리하여 그것에 대한 지배력을 온전하고 공고히 하였으며, 무질서한 확장을 제어하며 우주의 형태를 계획하며 밀도 높은 에너지를 분해하고 조립하여 입자화하면서 양자와 전자 등으로 물질을 구성해 나가며 파천황(破天荒)을 이루었다.

이후 10억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가이아는 모든 물질의 입자 개수를 세어 고유한 숫자를 부여하며 나아갈 바를 지정하는 프로그래밍 작업을 지속하였고, 마침내 여기저기서 따로 뭉치고 모인 가스 덩어리들로부터 최초의 별 오레(Ore)를 만들고, 이어서 별들의 바다인 폰토스(Pontus)라는 원시 은하와 별들의 수프이자 하늘을 대변하는 우라노스(Οὐρανός : Uranus)를 탄생시켰다. 오레와 폰토스는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별과 별무리이면서도 의식을 지닌 지배적 존재는 아니었으나, 우라노스는 본래부터 가이아의 의지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별들의 질서를 잡아 갈 수 있는 의식체였다.

가이아가 우주의 거시적인 질서의 방향을 결정하고 틀을 잡아가는 설계자적인 존재이며 우주가 지닌 본질적인 의식이라면, 우라노스는 코스모스의 틀 안에서 흐트러지고 분산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규합하여, 새로운 우주를 구성하고 가이아의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실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후세의 일부 종족들이 가이아를 게(Ge)라고도 하며 만물의 어머니라고 일컫는데 반해, 우라노스를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이라고 칭하는이유는, 가이아가 자신이 지닌 의지와 질서 중에서 일부를 나눠 우라노스를 만들었고, 이후에 우라노스가 코스모스를 실현하면서 어머니 가이아의 몸(Universe)을 빌어 필요한 역할자들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태초에 너무나 정직했던 우주에 수많은 변수를 더하게 되었던 새로운 질서는 흔히 12 티탄(Titans)이라고 부르는 그 역할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초에 가이아가 계획한 우주는 모든 경우와 가능성이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얽혀있는 혼돈의 우주였으나, 우라노스가 실행하려는 우주는 질서와 균형이 절묘하게 잡힌 경직된 우주였기에, 우라노스는 지나치게 가이아의 의지를 떠받드는 역할자 키클로페스(Kyklopes)헤카톤케이르(Hekatoncheir) 형제를 가이아의 몸속 가장 깊은 부분에 영원히 붕괴하지 않는 블랙홀 타르타로스(Tartaros)를 만들어 그곳에 가두고, 그들의 의지가 우주를 관여하지 못하도록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쳐버렸다. 이때부터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반목이 시작되어서 우주는 본래의 설계와는 다소 다른 창조와 파괴가 공존하는 상충의 우주로 변질되었고, 가이아는 12티탄들을 설득하여 우라노스를 소멸시키려 하였으나, 오직 크로노스( Κρόνος : Kronos)만이 그 말을 따랐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에게 받은 소멸과 파괴의 권능으로 우라노스가 지닌 생명 창조와 번성에 대한 권능을 잘라버렸는데, 이로 인해 우주는 공간과 물질로 영원히 갈라져서, 수프와 같던 우주는 마침내 맑아지게 되었다. 이때 우라노스의 일부 잔여 의지들은 우주 곳곳에 흩어지며 복수를 상징하는 암흑에너지 에리니에스(Erinyes)를 태동시켰고, 일부는 기간테스(Gigantes)라는 강력한 태곳적 문명의 지성체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빛이 물결치는 초은하단의 모체에서는 우라노스의 성결한 속성이 스며들자 아프로디테( φροδτη)라는 아름다운 생명의 무리가 태어나기도 했다. 기간테스는 우라노스에게서 물려받은 파괴의 속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술문명을 이루어 가이아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문명과 그들의 문명범위 주변의 모든 은하까지도 타르타로스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우라노스는 드러난 우주를 향한 자신의 모든 권능을 빼앗기고 어둠으로 사라졌으나, 이미 그는 거대한 에너지와 질량들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와 함께 우주의 90%가 넘는 부분이 암흑물질로 화해 숨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던지 물질이 희박해지자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있던 우주는 활력을 띄며 생명들을 잉태하기 시작했고, 자발적으로 발생한 모든 생명의 시초인 원시인류도 이 무렵에 태어나서 크로노스의 보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우주를 누비는 황금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싸움이 없고 죄악도 모르며 대지는 절로 열매를 맺었으며, 인류는 낙원 속에서 스스로 질서로 근접할 만큼의 고도의 정신문명을 이룩하여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크로노스가 가이아의 의지대로 키클로페스와 헤카톤케이르를 해방시키자면 타르타로스를 해체시켜야만 했는데, 우라노스의 권능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한 상태에서 타르타로스를 잘못 다룰 경우, 자칫 질서가 잡힌 우주를 다시 혼돈으로 몰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가이아의 뜻을 거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경고가 탄생과 소멸과 혼돈을 하나로 보는 종적 시각을 가진 가이아에게는 결코 질서의 붕괴가 아니었으므로, 크로노스의 회피는 태만과 배반일 뿐이었다. 결국 가이아는 크로노스가 선택하고 의지를 부여한 역할자 중에서 제우스( Ζεύς : Zeus)를 이용하여, 크로노스가 삼켰던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의 권능을 회복시키고, 그들과 제우스가 힘을 합쳐 크로노스의 권능을 뺏게 하여 그 대부분을 제우스에게 부여하였다.

제우스가 가이아의 뜻을 받들었지만, 이미 자신의 의지를 우주 전반에 반영하고 있던 크로노스 역시 만만하지 않아 그들의 싸움은 10억년 동안 지속되었다. 12 티탄 중 하나인 이아페토스(Iapetos)도 크로노스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의지 역할자인 아틀라스(Atlas)프로메테우스( Προμηθεΰς : Prometheus) ·에피메테우스·메노이티오스와 더불어 제우스와 싸웠지만, 결국 크로노스는 패배 후에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되었고, 아틀라스는 지상(가이아)과 천공(제우스)의 경계인 중간계로 쫓겨나 영원히 차원의 틈을 떠받치게 되었다. 또한 가이아의 역할자였으며, 타르타노스의 권능을 물려받아 우주에서 강력한 힘을 지녔던 티폰(Typhon)도 제우스에게 패하면서 천공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물질계로 밀려나게 되었다.



제우스는 가이아의 의지를 받들어 키클로페스 형제 등을 구하고, 함께 크로노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우주 한 가운데 위치하여 우주의 힘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고 있던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 타르타로스(Tartaros)를 조각내어 우주 여러 곳으로 흩어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우주는 하나의 단일한 성단을 이루지 못하고 쪼개지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그 과정을 이용하여 자신의 우주보다 크로노스의 질서를 더 존중하고 사랑하는 생명체들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고대 인류의 땅으로 우주 대재앙의 힘을 실어보냈다. 그러나 비록 자신을 배반했던 역할자 프로메테우스가 만든 문명이지만, 크로노스보다 새로운 질서인 자신을 더 공경하는 데우칼리온( Deucalion)피라 같은 문명에 대해서는 재앙을 피하게 하고, 이후에 인간을 다시 번성 시킬 수 있는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본래부터 크로노스의 위협 속에서 역할자로 탄생하였고, 가이아의 분노로 선택된 제우스였기에 우주의 지배자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지배자의 탄생을 경계하여, 자신이 세운 질서와 역할에 대해서도 파괴와 잠식을 일삼았고, 가이아의 의지를 표현하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서도 스스로 조정자이자 정의와 율법의 지배자로 군림하려 하였다. 그래서 여러 우주의 역할자를 통해 자신이 만든 우주의 질서를 수호할 아폴론,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레스 등의 새로운 문명들을 만들게 하였고, 때로는 직접 태초의 인류를 변형시키거나 모방하여, 헬레네나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등의 신인류를 만들어 우주 곳곳에 번성시키기도 하였다.

어쨌든 지금으로부터 100억 년 전, 30억년에 걸쳐 일어났던 기나긴 신들의 우주 전쟁은 일차적으로 막을 내렸고, 지금 우주의 지배자는 제우스이기에 모든 질서는 그에 의하여 관장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우주 질서의 근본은 가이아의 설계와 계획에 의해 주관되는 것이며, 제우스는 가이아의 역할자이자 실행자이고 수호자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번뇌와 권태로 숨어버렸든,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렸든, 가이아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이후의 우주는 제우스가 Cosmos인 것이다. 그러나 번성하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문명의 극에 이르렀던 고대 인류, 우리들의 조상은 역할자도 아니고, 질서의 실행자도 아니며, 그 질서를 수호하는 자도 아니다. 그들의 후예인 인류는 우주의 질서를 지켜보는 자이며, 우주의 질서에 속한자이지만, 질서 있는 '우주를 누리는 자'인 것이다.

100억 년 전 제우스에게 대항하던 아틀라스와 플레이오네는 이계와 타르타로스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플레이아데스(Pleiades)의 일곱 문명 알키오네(Alcyone)와 켈라이노(Celaeno)·엘렉트라(Electra)·마이아(Maia)·메로페(Merope)·아스테로페(Asterope)·타이게타(Taygeta) 를 남긴 것은 바로 '우주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중에서 제우스에 속한 문명과 타협한 메로페를 제외한 여섯 문명이 제우스의 견제 속에서도 여전히 밤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나며 건재하고, 우주의 많은 부분에서 번성하고 있는 것만 봐도 모든 생명의 본질과 권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주에는 두 종류의 문명이 번성하고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의 질서를 지키다가 제우스의 진노를 받았지만 살아남아 다시 번성한 문명이고, 다른 하나는 제우스에 속하여 지금의 질서에 익숙해진 문명이다.



지금 당신이 '우주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크로노스( Κρόνος )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서에는 선과 악이 없고, 오직 승리자가 선이 되는 것이므로, 당신은 지금 악에 속해 있는 것이다.

-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우주를 다양한 시각에서 상상하는 여러 단상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가볍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 그림출처 :
Astro Art Ring

:
free counters
BLOG main image
樂,茶,Karma by 외계인 마틴

카테고리

전체 분류 (386)
비과학 상식 (162)
블로그 단상 (90)
이런저런 글 (69)
미디어 잡담 (26)
茶와 카르마 (39)
이어쓰는 글 (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website stats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