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계인 마틴 3편에서 이어집니다.

내가 지구에서 처음 한 것은 이곳에 사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전자는 아무리 사소한 역사일지라도 한 치의 삭제 없이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고스란히 기록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주의 속성을 압축할 수 있는 형제들의 무한한 공간 지각력과 인지력의 작용원리는 그대로 후세들의 유전자 안에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압축하는 그 경이적인 능력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나, 생명체들이 생존에 집착하다 보니 정보에 대한 순수성이 훼손되어, 저장된 정보를 재생하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은 거의 상실해 버린 상태였습니다.

물론 정보를 온전히 사용하여 자신에게 적용할 능력이 있다면 그는 이미 생명체가 아니겠지만, 내재한 정보를 지금보다 조금만 더 활용할 수만 있어도 의지의 통제 속에서 끊임없는 세포재생이나 자유로운 구조변경으로 매우 획기적인 상태로의 진화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진화의 한계점을 일괄적으로 설정하기라도 한 듯이, 개체나 특정 종의 특출한 발전보다는 종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왕성한 생식력과 번성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인지, 진화는 어느 수준에서 정체를 맞이하게 됩니다. 게다가 모든 생명체는 -종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개체 자신이나 종족의- 생존을 개체의 최선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의문을 풀고자 십억 종이 넘는 생명체들의 기록을 꼼꼼히 읽으므로 그들의 지난 과거의 역사를 살폈고, 그 속에서 오래전 형제들이 생명으로 탈바꿈하며 꿈꾸었던 미래에 대한 설계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형제들은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변수들을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는 방대하고도 세밀한 생존 전략을 계획하여 유전자의 기본 골격으로 압축해두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병합체에서 벗어나 산개하여 정착을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의 전지적인 의식이 유지되는 동안, 생존을 위해 미래에 대해 정교한 설정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나는 형제들이 수억 년에 걸쳐 축적한 복잡하면서도 정밀하고 상세한 생존 전략과 목표에 이르기 위한 치밀한 계획들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의 번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온 우주에 자신과 닮은 개체를 가득 채우려는 거대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생존을 우선으로 하자면 아무리 진화를 해도 각 개체능력이 제한된다는 것을 예측하고도, 재생과 활용 능력을 훨씬 웃도는 정보저장 능력을 무한하게 이어온 것도 생명체를 통해 이룩하려는 궁극의 진화를 염두에 둔 계산된 설계였습니다.

십억 년을 넘고, 백억 년이 걸릴지라도 생명체는 우주에서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주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라면 개체의 개별적 공간과 유기적으로 이어진 종의 집합된 유전자 안에 무한하게 저장된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한 우주의 정보가 차고 넘치며 발현하는 순간, 우주의 속성을 닮은 형태로 진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주의 속성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다양하면서도 순수한 상태가 섞인 것이며, 우리와는 다르지만 새로운 형태의 불멸하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우주를 고스란히 닮은 또 하나의 우주로 진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래부터 존재하던 천억 개가 넘는 속성이 모여 새로운 통합사념체를 이루었다면, 분열했던 우주 속성의 최소 단위였던 형제들은 자신의 개체를 천억의 천억 개만큼 복제시켜 그를 통해 우주를 경험하게 하여 마침내는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을 이루는 진화를 계획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숨 쉬며 삶을 잇는 모든 생명-의식조차 없을 것 같지만, 끊임없이 분열하고 변이하는 바이러스를 포함해서-은 사는 동안 경험하며 느꼈던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저장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멸망을 피해 살아남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우리와는 다르지만, 우리와 같은 무한의 지성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구형 생명체뿐만 아니라 우주에 산재한 은하의 숫자보다 많은 백억 배가 넘는 독특하지만 닮은 형태의 생명체들도 자신과 자신의 종과 자신의 모든 조상이 체험한 만큼의 우주와 닮은 전지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물론 살아남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최후의 진화를 이루었거나 그에 근접한 종족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없는 걸 보면, 형제들이 생명체로 탈바꿈하고 나서의 수십억 년은 충분한 번성을 이루기에는 부족한 세월인 듯합니다. 태고의 지성을 되찾기 시작한 종족은 제법 많지만, 그중에서 비교적 우위에 속한 종족들도 여전히 지역우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다양한 우주를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배타적인 사고를 지녔으며, 미지의 대상을 경계하며, 우주를 두려워하는데, 이런 마음이 지성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상대적으로 늦게 발현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들이 이미 30억 년의 경험을 통해 진화를 이루고 새로운 도전이 한창일 무렵에 형제의 후손 중 하나가 막 탄생한 신생행성을 선택한 것은 역시 번성이라는 본능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그 형제가 계획한 생명체는 모성이 적색거성에 삼켜지며 소멸하였지만, 30억 년의 경험을 축적한 생명의 씨앗은 일억 년을 우주에 떠돌다가 지구에 정착했습니다. 오랜 겨울잠으로 상당수의 정보가 손상을 입었음에도 그 씨앗은 발아하자마자 번성과 정보획득과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이라는 본래의 속성을 충실히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30억 년의 경험보다 절망과 위기의 일억 년 동안 누적된 특이한 심리적인 경험이 새로 시작된 생명에 더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구의 생명체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안정된 환경보다는 경쟁하는 상태에서 생명력과 지성이 향상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지구 생명과 같은 줄기에서 태어난 씨앗이 상대적으로 짧은 2만 년의 부유 기간을 보내고 정보의 손상 없이 가까운 별에 정착하였으나, 그들은 다른 많은 형제의 후손들과 큰 차이가 없이 완만하지만, 안정적인 번성과 진화를 구가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확실히 생명에게 생명에 대한 위험은 가장 큰 자극을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구의 생명체가 다른 형제 생명과 구분되는 가장 뚜렷한 차이는 생체 구조의 기본골격이 탄소 원자를 갖는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는 십만여 종이 있고, 보통의 생명이 생존하는 표면적인 일반우주에는 이백여 종이 있는데, 그중에서 안정된 구조를 가질 수 있는 화합물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지구 생명체가 유기화합물을 선택한 것이 특별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반적인 우주 생명체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생체 구조를 지속할 수 있는 무기화합물(inorganic compound)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구 생명체는 모체에서 떨어져 나와 지구에 정착한 이후 어느 순간부터인가 불완전한 유기체를 선택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주에 드문 특이한 환경을 가진 이 행성에서 살아남으려는 이들 생명체의 어쩔 수 없이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그림 출처 : Dirk's Space Art
- 외계인 마틴 5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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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계인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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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0 10:3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빼어난 글솜씨 잘 보고 갑니다.
    잔잔한 바람이 불고 가을스런 날이예요
    • 2009.11.10 22:1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노랗게 마른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 보았습니다.
      가을은 늘 없는 듯 다가옵니다.
      잘 지내시죠?
  2. 한빛
    2009.11.10 12:0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어둡고 음울한
    일들에 위로라도 전하는듯
    요사이 밤하늘의 별빛은
    더 밝고 생생해진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글을 통해
    맑은 정신상태로 이끌어주시는
    마틴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2009.11.10 22: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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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빛님은 어찌 지내시는지 몹씨 궁금합니다.
      어느 곳에 있어도 별은 작고 반짝이겠죠?
      평안한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 한빛
      2009.11.12 19:4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곳은 정말 생명력이 넘쳐 흐릅니다.
      마치 인체의 혈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한국만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곳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이끌 무언가가
      배태될 잠재력이 무궁하다고 느껴집니다.
      광합성 열심히 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것에 한가지씩
      도전해보고 있습니다. 조만간 블로그를 통해 소소한
      소식 전해드릴께요 ^^ 건강하십시오.
    • 2009.11.13 19: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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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역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미래를 개척하시는 모습이군요.
      10년후 한빛님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건강 잘 챙기시고 다시 뵙겠습니다.
  3. 바른 애국
    2009.11.16 05:5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오래간만에 들르게 되는군요! ^^

    다른 일로 바빠 여길 들르고 싶어도 시간이 좀 부족한데...
    그게 참~ 못내 아쉽습니다!

    더군다나, 나라일도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고 말이죠...
    (국가재정을 일부러 파탄내서 유럽식 복지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저들의 악랄한 작전에... 가만 손놓고 있을 수도 없고요~)


    흠~ 뭐, 암튼간에 이런저런 골치아픈 일들을 제껴놓으면 더없이 좋은 쉼터가 될 수 있을 님의 블로그에... 되도록이면 자주 올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 생명이 다하면 그 뒤에나 다신 오지 않게 되려나? 좀.. 그런 얘긴가요? ^^

    쩝...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__)
    • 2009.11.23 20:2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여러가지 핑계로 블로깅을 미루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블로그에 있습니다 ^^
      아직도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많은데 먹고 사는 문제는 이 순간도 벽이 되는군요.
  4. 2009.11.21 15:2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5. 2009.11.23 17:3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오랜만에 마틴님 글을 보니 머리가 지끈(...)

    역시나 화두를 주시는데는 탁월하십니다. 어쨌든 당장은 불안전한 유기체로 구성된 모습을 하고계신만큼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2009.11.23 20:2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안그래도 한동안 목감기가 심해서 고생을 했습니다.
      때로는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린B님도 건강하게 겨울 맞이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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